알렉산데르 6세와 사보나롤라
근세 교회사 초기의 특징은 개혁의 필요성이 확산된 상황이다. 교황을 위시하여 일반 신자들에 이르기까지 복음정신에서 벗어나 많은 폐해를 드러내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토양이 이미 마련되었었다. 이미 교회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에 투신한 수도자들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 위협과 내부의 부패 등 교회는 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불안과 혼란의 무정부 상태에서 보다 강력한 교황 후보자를 찾고 있었다.
교회를 위해서는 불행하게도 성직매매의 혐의를 받으며 알렉산델 6세 교황으로 선출된 스페인 출신 보르지아(Borgia)는 정략적인 수완에는 뛰어났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 최고위 지도자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때 회개와 속죄의 설교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피렌체를 ‘거룩한 도시’로 변형시킨 수도자가 등장하였으니 그가 바로 예로니모 사보나롤라(Hieronlymus Savonarola, 1452~1498)였다. 도미니꼬 수도회 회원으로서 1488년 피렌체의 성 마르코 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된 그는 수도회의 쇄신에 온 힘을 쏟으며 회개와 속죄의 설교로 교회의 쇄신을 촉구하였다. 그의 지도로 피렌체에 신정정치(神政政治)가 시행되어 약 7년 동안 그의 정치·종교적인 영향력이 계속되었다. 많은 신자들로 교회가 가득차고 저속한 오락은 사라지게 되었다. 교회쇄신운동을 이탈리아 전체에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로마의 부패가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로마를 비판하였다. 사보나롤라의 활동은 알렉산데르의 정치적인 행보에 장애거리였고 자신의 명예를 심히 실추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교황은 그에게 설교를 금지시키고 로마로 호출하였지만 성직매매로 선출되고 사생활이 무질서한 알렉산데르가 참된 교황이 될 수 없다며 그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는 곧 파문을 당했다. 그래서 그는 황제와 국왕들에게 공의회 소집을 요청하며 알렉산데르의 불법성을 확정받으려 하였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쇄신운동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의 반대와 추방되었던 메디치가(家)의 피렌체에로의 복귀 공작으로 그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그리고 알렉산데르는 그를 침묵시키지 않는다면 피렌체 도시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겠다고 위협하자 반대자들이 성 마르코 수도원을 습격하여(1498) 그와 두 수사를 법정에 서게 하였다. 그들은 투옥되어 고문과 반복되는 심문으로 죄목이 위조되어 사보나롤라는 ‘이단자, 이교자, 성청을 모독한 자’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앞두고 감방에서 쓴 그의 최후 기록은 깊은 신앙심과 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가 알렉산데르 개인의 부도덕함을 공격하였지만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직 자체를 멸시하지는 않았다. 교회쇄신을 촉구하며 교회가 거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 교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직무와 사람을 구별한 점에서 피렌체의 수도자 사보나롤라와 비텐베르그의 수도자 루터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고 본다.
그는 부당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인간 알렉센데르 때문에 거룩한 교회가 불경스럽게 짓밟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알렉산데르와 그의 추종자들이 준비한 화형의 장작더미 위에 오르기 전에 아주 경건하게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며 자신을 주님께 맡겼다. (1498년 5월25일). 1955년 이래 도미니꼬 수도회는 그의 시복 수속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긍·부정적인 면으로 고려될 수 있다. 사보나롤라 자신의 원의는 아니었겠지만, 그의 설교로 교황좌 주위에 이미 팽배해 있던 불신을 가중시켰고, 이러한 불신을 불식시키는데 꽤나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회개와 속죄의 설교, 초대교회의 복음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쇄신운동이 후대의 교황들과 성인성녀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업적이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신분과 직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생활로 베드로 사도좌의 품위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교리문제에 개입하려는 것에 대해서 자제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또 아메리카 대륙에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에 선교 분계선을 확정하였으며 세속 권력으로부터 성좌의 권위를 회복하는데 업적을 남겼다.
하느님께서는 악에서도 선을 끌어낼 수 있고 일부 교직자들의 잘못도 구원의 역사를 발전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한 책임자나 한 공동체가 본래의 사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속의 유혹에 빠질 때마다 교회는 분열되고 큰 상처를 받게되며 그때마다 흔적을 남기게 된다. 권위는 개인의 명예나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한 특은의 보증일 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