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가 돼서야 본격적인 전교활동에 들어가는 수녀가 있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척 궁금해질 것이다.
서울 ‘막달레나의 집’ 원장 문 요안나 수녀(63세·메리놀수녀회)는 그래서 교회안의 유명인사가 됐다.
벽안의 수녀지만 매일 밤 10시쯤이면 서울 용사지역의 홍등가에 나서 사회 속에서 가장 소외되고 불우한 매춘여성들에게 따뜻한 인사 한마디를 벌써 10년 가까이 나누고 지내온 문 수녀는 이방인이 아니라 한국 여성들의 아픔과 고통을 짊어져온 바로 ‘한국 여성들의 어머니’이다.
올해 10월로 한국에서 생활한 지 딱 만 40년을 맞이한 문 수녀에겐 이제 고향인 미국보다 타향인 한국 앞에 ‘우리’라는 단어가 더 잘 붙여 질만큼 한국사람이 돼 버렸다.
자신의 40년 한국 선교생활을 회고하며 던진 “일복보다는 인복이 많았다”는 단 한마디의 말은 한국 사람들에게 대해 가진 문 수녀의 정과 사랑이 얼마나 두터운 것인가를 말해준다.
문 수녀가 샌프란치스꼬에서 15일 동안이나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1953년 7월 23세의 젊은 나이였다. 전쟁의 암울한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피난민들이 홍수를 이루던 부산의 메리놀병원에서 문 수녀는 간호사로 첫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때 한국의 상황은 정말 볼 수가 없었어요. 전쟁으로 인한 각종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이 태반이였으니까요. 정말 보지 않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봉쇄 수녀원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했었지요”
어느 때는 너무 많이 몰려드는 환자를 다 치료할 수가 없어 문 수녀가 직접 “오늘 치료를 안 하면 꼭 죽을 사람”만을 가려내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진 적도 있었다. “내일 뽑으려고 마음에 두었던 사람인데 보이지 않으면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는 문 수녀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아 수녀간호사로 활동하며 바쁘게만 지냈지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아무것도 몰랐던” 문 수녀가 사회의 정의와 평화, 노동자 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63년 강화도에서 병원을 시작할 때였다.
당시 주임신부였던 천 미카엘 신부의 지도아래 그 지역 직물공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JOC(가톨릭 노동청년회) 교육을 받은 문 수녀는 이후 서울 가리봉동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소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미국본원에 돌아가야 했던 문 수녀는 3년만인 7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가족계획,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점액관찰법을 가르치게 된다. 생리, 임신 등 여성신체의 신비를 재발견한 문 수녀에겐 이 활동이 바로 여성에 대한 관심과 여성인권에 투신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던 차에 84년 국제 아시아 오세아니아 수녀협의회(AMOR)가 열려 한국 평신도 여성들이 무슨 활동들을 하고 있는지 현장체험을 하는 기회가 생겼지요. 그때 매춘녀를 위한 막달레나의 집에 가게 됐어요. 용산지역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랑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매춘여성이 되기까지의 이런저런 얘기를 들으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때 막달레나의 집에서 활동하던 평신도 이옥정씨가 한국인 수녀 한 분이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문 수녀가 “자신은 어떻겠느냐”고 적극 나섬으로써 막달레나의 집은 문 수녀의 안식처가 됐다.
이후 문 수녀는 매춘여성 뿐만 아니라 가정폭력, 성폭행이나 미혼모 등 불우한 여성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나섰다. 최근 주한미군 윤금이 살인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올바른 처벌’을 요구했던 문 수녀는 KNCC에서 정한 올해의 인권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부끄러워서”를 자주 말한 만큼 수줍음을 잘 타는 문 수녀지만 불우한 여성에 대해서만은 “내가 언제나 그들의 벗이 되어주고 방패가 되어 주겠다”는 굳은 의지와 용기가 가득하다. 한마디로 외유내강이다.
20평도 안 되는 용산의 전셋집에서 불우한 여성과 그의 자녀들 10여 명과 함께 비좁게 살면서도 ‘그저 기쁘고 즐겁기만 한’ 문 수녀는 딱 한 가지 ‘막달레나의 집이 여성들을 위한 올바른 쉼터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별도의 사무실을 마련했으면’하는 소망을 갖고 있기도 하다. 또한 ‘북한에서 꼭 선교를 해보는 것’과 ‘죽어서 이 땅에 남을 수 있었으면’하는 바람이 아무도 몰래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