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1,34-44)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그리고 이들을 문상하러 왔던 유대아인 친구들 모두 슬픔에 잠겨 울고 있었다. ‘여왕이시여’로 시작하는 성모찬송가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체읍하는 골짜기에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당신을 우러러 보며 탄식하나이다’ 죽음이 사람의 생명을 잡아간 이 현장에는 눈물이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 이 광경을 대면하고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져 죽음의 세력에 대한 비분과 더불어 통곡하는 인간들과 같은 심정에 잠겨 눈물을 흘리셨다.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인간들을 보기가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이사 53,3)이었다.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나는 일은 생명을 되찾는 일밖에 없다. 이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사람은 죽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확신을 사람들은 가질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이 일을 해낼 시기가 지금 가까워지고 있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죽음의 현장으로 안내하라는 말씀이다. “와서 보십시오”라 하고 그들이 대답하였다. 전에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곳을 알고 싶다고 할 때 예수께서는 “와서 보십시오”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필립보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 성서에서 예언된 분을 만났다고 하며 역시 와서 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그 때에는 빛이시며 생명의 샘이신 분을 와서 보라는 초대의 말씀이었고 이번에 통곡하는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보라고 한 말은 죽음과 고통의 현장을 와서 보라고 한 말이었다.
이윽고 예수께서는 무덤으로 안내되었다. 유대아인들의 무덤형식은 대체로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암벽을 파서 작은 방을 만들고 시체를 안치한 다음 돌로 입구를 막아 놓은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동굴을 파서 시체를 안치하고 뒤를 돌로 덮는 형식이 있다. 첫 번째가 예수께서 묻히셨던 형식이었고 (마르 15,46 마태 27,60) 라자로의 무덤은 두 번째 형식의 무덤이었다. 무덤에 와서 예수께서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생각하며 우셨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우신 일이 두 번 보고되어 있다. 후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며 우셨다(루카 19,41).
두 번 다 죽음과 멸망을 보시며 우셨고 이 눈물은 인간 예수로서 하느님께 죽음에서 구해달라는 구원을 호소하는 눈물이었다. (히브 5,7)
이곳에 와있던 유대아인들은 예수께 대하여 호의적인 패와 의심을 품는 패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복음서는 암시한다. 예수께서 죽은 라자로를 위하여 우시는 것을 보고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나보다고 말하는 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는 우리를 무척 사랑하고 계신다’라는 고마운 정을 가졌다. 그러나 소경을 보게 한 사람이 왜 라자로를 죽지 않게 막지 못 했는가 라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우리 주위에는 늘 있다.
예수께서는 비통한 심정을 가누시면서 “돌을 치워라”하고 명령하셨다. 무덤 뚜껑을 열라는 분부였다.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는 이미 시체 썩은 냄새를 맡은 듯 자기 오빠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고 환기시켰다. 그녀는 예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무덤을 건드리는 것은 유대아인들에게는 큰 불경을 범하는 일이어서 혹시 유대아인들에게 무슨 화를 입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참뜻을 밝히신다.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돌을 치웠다. 믿는 유대아인들이었을 것이다. 이제 예수의 기도 후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인데 요한복음서의 첫 번째 기적(가나잔치의 기적 요한 2,1-12)이 당신 영광의 첫 표징이었다면 이번 기적은 영광의 마지막 표징이 되어 요한복음서가 ‘영광의 책’이라는 특색을 드러낸다.
예수의 기도는 특징이 있고 우리는 늘 그 기도법을 따라야 한다. 먼저 아버지를 부르고 감사한 다음 하느님께 대한 강한 신뢰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요청은 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자유롭게 가도록 하셨다. 마지막 날 우리가 부활하여 완전 자유의 몸이 되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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