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회적 상황
일반적으로 농업을 경제기반으로 하는 사회는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보수성이 강한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인 신분계급이 결정되는 것보다는 혈통에 따라 세습된 농경지 보유 면적의 정도에 따라 정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는 농촌의 기반이 흔들리고 경제구조가 변화되면서 사회적 불안심리가 최고조에 달했다.
성지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군주·제후들의 야심과 상인들의 탐욕으로 추진되었던 제4차 십자군 전쟁 이후 동·서양의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따라서 동·서방 교역을 위한 교통의 요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상업거래가 이루어져 종교개혁 시대에 와서는 사회적 신분질서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농경지를 재산과 신분의 기반으로 삼았던 대지주들을 귀족이라면 상업과 금융업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한 도시의 재산가들은 신(新)귀족으로 등장하였다.
상업을 본업으로 하는 중산층과 직물, 광업 등에 투자한 사업가들의 경제활동으로 도시는 번창하였다. 도시에 집중되는 부 덕분으로 도시의 중심광장을 거대하게 꾸미고 신귀족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저택을 궁궐처럼 사치스럽게 장식하였다. 대학에서는 지적 활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특히 인문주의자들을 비롯하여 법률가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광산업에 투자한 금융업자들의 성공적인 활동으로 근대자본주의의 등장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경제구조의 개편으로 기존 기득권층의 일부가 몰락하고 도시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최저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적으로 무산계급의 하층민이 증가하는 비례에 따라 사회적 불안이 점점 확산되었다.
대 군주들은 자기들의 영토에서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왕조체제를 실현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스리고 있는 전 영토에서 절대주의적인 권력을 행사하면서 이를 외적으로 과시하려고 경쟁적으로 자기 궁궐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몄다. 따라서 이에 필요한 재원마련을 위하여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여 소작인들의 원성이 드세어지게 되었다.
용기와 상무정신(尙武精神)의 덕성으로 높이 평가받아 사회적으로 귀족적인 신분을 누렸던 기사(騎士)의 역할이 귀족무산자(無産者)로 몰락하게 되었다. 새로운 무기개발로 전쟁에서 창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진격하는 기사들의 효용가치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대포를 사용하는 보병들의 공격으로 멀리서도 기사들이 지휘하는 성(城)들을 함락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 군주들의 용병으로 들어가든지 노상(路上)강도(raubritter)로 변신하여 도둑질을 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기사출신으로 반란이나 용병 혹은 종교개혁에 나선 인물로는 지귄겐(sic-kengen+1523)이나 폰 후텐(non hutter+1523)이 유명하다.
도시의 하층민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품삯으로 연명해 나가는데 그들의 소속 조합에서 아무런 권리행사를 못했다. 왜냐하면 조합이 사업가나 주인 등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민 노동자들처럼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거의 행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사회구조나 신분질서가 개편되는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촌의 현실은 더 비참하였다. 제국 인구의 3/4을 차지한 농민들은 생계에 불안을 느끼며 현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 어떠한 봉기에도 쉽게 동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431년부터 1512년 사이에 12번이나 농민봉기가 있었다. 농민들은 지주의 종처럼 생활하면서 지주들로부터 도지(賭地) 사용료를 빚을 걸머지며 가혹하게 물어야 했다. 더구나 조상 대대로 고기잡이, 사냥, 목축, 벌목 등을 큰 제약받지 않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군주들의 허가를 받으며 세금을 물어야 했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지주나 군주 등 지배계급에 대한 이들의 원성과 불만은 점점 팽배해졌다.
당시 세속 제후직을 겸한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도 많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억눌리고 경제적으로 시달리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프롤레타리아계층은 사회지배계급과 함께 교회를 불의의 원인으로 원망하였다.
가난한 교회의 가난한 봉사자로서가 아니라 세속 권력가로서의 신분에 더 어울리는 인물들이 교회의 사목자로 군림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개혁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는 잃어버릴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도시의 하층민과 농민들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지 사회질서가 변화되는 것만이 자기들이 살아나갈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였다. 풍선 안에 한없이 공기를 주입시킬 수는 없다. 한계를 넘으면 터지게 마련이듯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하층민들의 불만은 이미 대변혁의 화약고에 불을 붙이려는 태세를 갖추고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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