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한 해 동안 생명존중과 환경·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한국 천주교회의 움직임은 두드러지게 부각된 이슈가 없는 가운데서도 관련 단체들의 꾸준한 활동이 돋보인 한 해로 평가된다.
이는 생명 및 환경문제가 어느 특정 시기를 막론하고 늘 교회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왔다는 점에서 일면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으나, 한편으로 지난해 사실상 낙태허용을 규정한 형법개정안 제135조의 폐지를 주창하며 전개된 낙태반대 서명운동과 같은 보다 강력하고 결집된 교회의지를 표출할 기회를 마련하지 못한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는 올 한 해도 역시 생명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을 재확인하고 이를 실생활에 구체화시키기 위한 각종 교육 실천 운동들을 전개, 내실을 꾀하려는 흔적을 엿볼 수 있다.
93년 한 해 동안 생명존중·수호를 위한 교회의 노력은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생명」 반포 25주년을 기념해 전개된 일련의 활동에서 두드러진다.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위원장 박토마 주교)가 중심이 돼 추진된 「인간생명」 반포 25주년 기념사업들은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경외심을 불어일으킴과 동시에 이 땅에 만연된 낙태현실을 참회하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지난 6월22일 전국 각 교구 가정사목 담당 신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간생명」 반포 25주년을 맞아 “연간 1백50만건에 달하는 국내 낙태현실을 참회하고 생명문화 건설을 기원하는” 25번의 타종을 실현키로 한 결정은 ‘태아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교회의 간곡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가정사목위는 이와 함께 ‘생명과 가정’을 위한 미사를 각 본당의 자발적인 참여로 봉헌키로 하는 한편, 생명운동 차원의 대국민 실천사업으로 ‘태아의 발’ 배지달기운동을 전개해 관심을 모았다. 이 배지는 특히 ‘실물크기의 임신 10주된 태아의 발모양 배지’라는 점에서 상당한 홍보·교육적 효과를 가져왔었다. 가정사목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난 7월 “도덕성 회복과 생명존중 풍토조성에 앞장서 줄 것”을 촉구하는 ‘생명존중의 새 문화창조를 위한 호소’ 서한을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는 등 생명운동과 관련, 교회내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수행에 바쁜 한해를 보냈다.
가정사목위가 이처럼 큰 물줄기를 잡아간 반면, 한마음한몸 운동본부가 「인간 생명」 반포 25주년을 기념해 10월5일 개설한 ‘참생명학교’는 교회의 이러한 생명수호의지를 구체화시키고 뒷받침함 교육 프로그램으로 평가된다. ‘생명과 사랑을 위하여’를 주제로 8주간 1기를 시작한 ‘참생명학교’는 낙태와 피임 등 낯익은 문제뿐만 아니라 마약, 노인, 미혼모, 청소년 비행과 성교육, 인공수정 등 생명과 관련된 제반 문제를 폭넓게 다뤄 큰 관심을 모았다.
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0번째 회칙 「진리의 광채」 반포(10월5일) 역시 ‘인간존엄’에 관한 교회의 전통 입장을 거듭 천명하고 현 사회의 도덕적 위기를 질타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의 생명운동에 큰 활력소가 되어준 사건이었다.
생명문화연구소(소장 박종대 교수)가 올 한 해 동안 실시한 세 차례의 생명관련 세미나와 서울대교구가 용인공원묘지 내에 설치한 ‘낙태아무덤’도 생명경시 풍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준 계기로 평가된다.
환경문제와 관련해 올 한 해 동안 교회의 커다란 움직임은 한마음한몸 운동본부가 교회 최초로 ‘천주교 환경상’을 제정한 것과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의 ‘환경윤리 선언’ 교회 내 22개 환경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열린 ‘푸르름을 만드는 잔치’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신자·비신자를 불문하고 환경운동에 공이 큰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 시상키로 한 ‘천주교 환경상’은 환경 관련 운동에 포상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교회의 생태계 보존 및 환경보호 의지를 한층 더 강화시킨 것으로 풀이된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된 ‘푸르름을 만드는 잔치’는 교회 환경 관련단체들은 물론, 정부 관계자들까지 대거 참여, ‘자연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임을 체험하는 소중한 자리로 기록됐다. ‘푸르름을 만드는 잔치’는 또 신자들의 이론적인 환경지식을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기회로 인식되기도 했다.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회장 김몽은 신부) 주최로 열린 ‘환경윤리 종교인 선언대회’는 인류생존의 위기로까지 치닫고 있는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 범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세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5월31일 성균관대 유림회관에서 있은 환경윤리 선언은 그간 실천적인 대안에만 매달려온 환경운동에 윤리와 도덕성에 입각한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평가받았다.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 종단 고문 및 회장단이 공동 서명한 ‘환경윤리 선언’에서 종교인들은 “그동안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수탈해 온 어리석음과 이를 방관, 방조한 과거의 잘못을 깊이 참회한다”고 밝혀 자연 생태계의 파괴가 인간의 이기심에 일차적 원인이 있음을 지적했다.
10월23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경갑룡 주교)가 주최한 ‘핵·원자력 발전과 환경’ 주제 세미나 역시 핵폐기물 처리와 관련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본당을 중심으로 전개된 소규모 환경보전 활동들도 올 한해 교회의 환경운동과 관련, 주목되는 부분이다. 자연파괴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서울 상계동본당의 환경보호 등반대회나 서울 둔촌동본당의 ‘푸르름을 가꾸는 잔치’, 논현동본당의 1회용 용기 안 쓰기 운동, 창동본당의 창조질서 보존의식 함양을 위한 생활공동체 교육 등은 바로 소규모이긴 하지만 신자 개개인을 상대로 한 환경보호의식의 저변 확대라는 측면에서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교회의 생명·환경운동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교회관계자들은 몇 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지적한다. 우선 신자 각자의 생활가운데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보다 다양하고 적극적인 실천 대안들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문화연구소가 실시한 생명에 대한 사회의식조사에서 천주교 신자의 생명존중의식이 상대적으로 타 종교 신자들에 비해 낮게 나타난 것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울러 어릴 적부터 생명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과 각종 환경운동 단체들을 유기적으로 총괄 조정할 수 있는 전담 부서의 설치가 시급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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