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새해 새아침이 밝았다. 참으로 감사롭고 가슴 가득한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해를 새로이 맞으면서 우리는 금년을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알차고 값어치 있게 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지난 90년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맞이하였다. 즉 89년은 90년대의 마지막 10년을 마무리하는 첫해로서 시작을 잘해야 한다는 의미를 두었었다.
또 다른 하나는 2천년을 불과 10년 눈앞에 둔 상황에서 90년은 10년 후 펼쳐질 2천년의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데 보다 큰 의미를 두었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과연 90년이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우리로서는 위의 두 가지 의미를 한국천주교회의 한해를 되돌아보고 91년을 조망해 봄으로써 대치하고자 한다.
90년도의 한국교회를 들여다보면 우선 전교가 제대로 안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현상은 89년 하반기부터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해가 바뀌었어도 회복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목적 그 자체이며 아울러 교회의 첫째가는 사명인 전교가 잘 안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로서의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왜 전교가 되지 않는가?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우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전교노력이 없거나 부족한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가 세상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984년 교황방한을 전후해 그토록 물밀듯이 밀려온 구도자들이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가? 물론 진리와 참삶에 대한 갈증이나 동경이 사라진 오늘의 사회현상 자체에도 그 탓이 있겠지만. 여하튼 90년은 전교면에서 큰 시련을 경험한 한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의 중산층화와 권력층화가 더욱 뚜렷해졌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중산층화·권력층화됨으로써 교회는 가난의 가치를 점차 잃어가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투신에도 운신의 폭을 스스로 좁혀가는 이중위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또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쥔 편에 서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성장·발전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그만큼 무너지고 부서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돼주기 어렵고 그들을 대변하는 일에 앞장설 수 없게 되었다. 뿐 아니라 짓눌리고 소외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교회에 희망을 걸고 도움의 손길을 뻗기도 쉽지 않게 된 것이 오늘의 교회모습으로 떠오른다. 교회가, 며칠전 외양간에서 태어난 아기 구세주의 그 가난을 따르지 않고, 죽음에 처해지면서까지 전능의 권력사용을 끝까지 자제했던 예수의 그 용단을 배우지 않는 한 교회는 점점 더 깊은 수령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교회에 세속화의 물결이 현저히 눈에 띤 것도 90년의 일이었다. 물론 이 세속화는 여러해 전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가속화되고 있다.
교회의 속화현상 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기도·묵상·희생·봉사·순명 등 전통적인 고유가치나 덕목들의 실천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점이다. 그 대신 사회일반인들과 똑같은 미신행위나 현세기복적인 행동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입시철을 맞아 생미사를 신청하는 신자들이 줄을 잇고 성당이나 성지 등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는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의 부유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것은 교회구성된 전체의 절반 이상 혹은 3분의2 정도가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세속화 및 부유화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즉 신자와 비신자 혹은 타종과 신자의 구분이 없을 만큼 천주교신자의 다른점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는 사실이다. 과거 같으면 어딘가 모르게 신자의 언행이나 삶의 모습이 비신자와는 다르다는 얘기들을 많은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모한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는 물론 신자수가 크게 늘어났고 공의회이전 엄격하고 철저했던 신앙생활 규정들이 완화된 탓도 있겠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금전만능과 현세적 부귀영화추구, 극도의 이기주의 및 개인주의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천주교신자수가 2백60만명을 넘고 있고 매년 전국적으로 초대형 성당들이 여러 개씩 늘어나고 있는데도 우리 사회는 조금도 개선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은데서 쉽게 찾아볼수 있다. 90년 한해 우리사회가 어떠한 시련과 진통을 겪었는지는 재론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비근한 예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한국평협이 전국적으로 벌이고 있는 ‘내탓이요 운동’도 신자들부터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는 ‘내 탓’을 지적해야 할일이 더 많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도 적지 않긴 하지만.
여하튼 신자들부터 ‘내탓’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은 그만큼 신자들의 양심이 무디어졌거나 양심형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데 있을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를 원하면 모든 사람의 양심을 존중하라’는 91년도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진리에 따라 자신의 양심을 형성하여야 할 의무를 느껴야하며 그 양심의 소리를 겸허하고 주의깊게 경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또 “모든 시대에 걸쳐 끊임없는 유혹의 하나는,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자기자신을 진리의 규범으로 삼으려한다”고 경고하고 참으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증표는 겸허하게 사랑하는 역량”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교회가 금년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곰곰이 반성해봐야 할 것이다. 교회는 결코 멀리 떨어져있는 것도, 성당건물을 가리키는 말도 아닐 것이다. 나 자신이 바로 교회이고 우리 가정이 바로 교회임을 새롭게 인식해야 하겠다.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그 가정의 구성원들이 이루어가야 할 우리의 91년도 교회는 바로 자신의 양심을 진리에 따라 새롭게 정립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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