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꼭 백년 전 5월 15일에 레오 13세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모든 사회회칙과 사회교서의 효시가 된 「노동헌장」을 반포하였다. 이 헌장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산업사회가 생산하였던 중대한 사회문제, 즉 노동문제에 직면하여 교회가 발전시킨 현대 사회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헌장 반포 1백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노동헌장」의 사회적, 사상적인 배경과 헌장의 중요한 내용 및 헌장의 결과에 대하여 알아본다.
사회·사상적 배경
첫째로, 19세기 후반에 이미 유럽과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빠른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1890년도에 영국 인구의 54%, 폴란드, 독일, 미국 인구의 30%, 그리고 벨기에·이태리·프랑스·오지리·스웨덴 인구의 10~12%는 2만명 이상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인구의 도시집중, 노동자 계급의 팽창, 소수의 자본가와 노동대중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왔다.
둘째로, 아담 스미스의 저서 「국부론」(1776)이 전파시킨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사상은 기업가와 정부 고위관리들의 거의 전폭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다. 자본주의자들은 개인기업, 자유경쟁, 시장법칙만이 경제활동을 지배할 최선의 법칙이고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들은 또한 국가의 역할은 국방과 사회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국한되고 경제활동에 대한 중립적 태도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조합이나 국가의 노동관계법을 경제법칙을 해치는 장애물로만 간주하며 반대하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어디에도 노동관계법이 계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조건, 그리고 긴 노동시간으로 고통을 당하였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당하였다. 그리고 노동조합이 각지에서 자생적으로 출현하자 자연히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는 치열하고 빈번한 투쟁이 발생하였다.
셋째로,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848년에 「공산당선언서」에서 그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몰락과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공산주의적 지상천국을 약속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사유재산제에 있다고 보았으므로 생산재산의 전면적 국유화와 자본가 계급의 타파를 주장하였다. 1870년대 이후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학자들의 주된 논쟁거리가 되었음은 물론, 노동자 계층 안에서도 선풍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상은 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자본가의 앞잡이로 규탄하였기 때문에 무수한 노동자들은 교회와 신앙을 배척하고 버리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자연히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사회주의자의 주도된 아래로 들어갔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였고 노동문제가 심각하였지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대부분은 노동조합이란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라고만 이해하여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지원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주교와 학자 신부들, 그리고 평신도들은 노동조합운동을 열성적으로 지원하고 이끌어가기도 하는 동시에 노동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열띤 논쟁을 벌였다. 실질적으로 노동자를 돕고 노동운동을 지원하였던 인물로서 영국의 마닝 추기경, 독일의 케틀러 주교, 그리고 미국 발티모어의 기본스 추기경을 들어야 한다. 가톨릭신자가 별로 많지 않던 런던의 마닝 추기경은 빈민문제와 부두 노동자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보여 왔기 때문에, 1889년에는 정부도 해결하지 못하던 부두대파업을 수습하는데 놀라운 공적을 세웠다.
독일 마인즈 교구의 케틀러 주교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서」를 발표하던 해인 1848년 사순절에 노동문제에 관한 특강을 시작하였다고 저서를 통해서 교회와 노동문제에 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한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설립에 적극성을 보였을 뿐 아니라 1870년대에는 노동자 보호법의 제정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미국의 가톨릭신자 대부분은 갓 이민 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1870년대에 출현한 노동조합원은 대체로 가톨릭 신자였다. 현재 미국 노동조합연맹의 전신인 ‘노동의 기사’가 1880년대에 두각을 나타내자 기본스 추기경은 주교단의 협조를 받으면서 그 조직을 강력히 지원하였던 관계로 많은 신자 지도자가 배출되었으며 따라서 미국에서 교회는 노동운동의 성장과 발전에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유럽에서 교회와 노동문제를 토의하던 학자들의 집단이 여럿 있었지만, 「노동헌장」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던 것은 리에즈(Liege) 학파와 안제르(Angers) 학파였다. 페렝(Perin) 신부가 이끌고 주로 프랑스인과 벨기에인으로 구성된 안제르학파와 라이문트(Rsimund) 신부가 조직하고 독일인들로 구성된 리에즈학파는 1880년대에 함께 모여서 대책을 자주 논의하였지만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다.
안제르학파는 국가의 간섭과 노동법 제정을 국가 사회주의라고 반대하며 자선사업을 강조한 반면, 리에즈학파는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과 입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물론 「노동헌장」의 초안이 작성되기 직전에 교황청의 복음화성성이 구성한 로마연구집단의 견해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그 집단도 국가의 개입과 입법을 지지하여서 리에즈학파와 유사한 견해를 보였다.
교황은 회칙의 서두에서 노사의 갈등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불안과 고민 속으로 몰아넣고 있고, 가난한 사람의 대부분이 비참하고 절박한 상태에서 비인간적 생활을 하기 때문에 신속하고 적절한 보호책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이어서 노동자의 사태에 관하여 회칙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노동대중의 빈곤과 노사갈등이라고 교황이 규정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요내용
교황이 회칙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노동헌장」을 반포한 것은 극심한 빈곤이 있고 착취와 인권유린이 자행될 경우에 교회가 무관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편을 들어야 하며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개입과 관심이 사목활동의 주변적이거나 이차적인 부분도 아닐뿐더러 안 해도 무방한 활동이 아니라는 점을 천명한 것이다.
교황은 자신의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앞서 당시에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던 사회주의적 해결책을 부적절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들은 노사갈등과 노동대중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유재산제의 폐지와 생산재산의 전면 국유화와 이울러 경제에 대한 국가의 완전 통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은 인간의 기본권인 재산 소유권을 박탈할 뿐 아니라 국가권력의 지나친 확대를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교황이 반대하였다.
사회주의적 해결책은 국가권력을 과도하게 확대하고 그런 국가는 개인과 부모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재에서는 해방되어야 하는 노동자가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고 교황은 생각하였다. 레오 교황은 사회주의적 해결책이 국가에 무소부재하고 절대적 권력을 부여 한다고 보았고 국가의 그러한 권력독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면 레오 13세 교황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였는가 그는 무엇이 노사갈등과 노동대중의 빈곤을 젝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나? 교황은 두 가지의 해결책을 제안하였는데, 하나는 국가의 개입과 입법이고 다른 것은 노동조합의 육성이었다. 국가의 개입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동선이나 어느 한 계층의 권익이 손상되고 위협받을 경우, 국가가 아니고서는 이 피해를 해결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을 때에, 국가 공권력의 개입이 인정된다.”(52항)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힘의 개입을 요청하는 구체적 사실의 성격에 따라서 결정되어야 하지만, 국가의 공권력은 잘못을 고치거나 위험을 없애기 우해 필요 이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개입의 한계를 결정짓는 기본원칙이다”(53항). 노사 당사자나 다른 어느 누구도 노사갈등과 노동대중의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면, 국가가 노동관계법의 입법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개입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다. 교황은 국가의 개입과 입법을 촉구한 것이다.
교황이 국가의 개입을 촉구하였지만, 그 개입의 한계를 강조한 것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국가의 개입은 문제해결이 요구하는 정도 이상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강조한다. 이것은 자유경쟁과 국가의 개입을 절대로 반대하던 자유방임주의에 반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적 해결책에 동조한 것도 아니다. 교황은 국가 개입의 한계를 강조해서 국가의 권력독점과 아울러 경제에 대한 국가의 전면 통제를 일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황은 안제르학파 보다는 리에즈학파의 주장에 동조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은 토마스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인용구가 보여주듯이 교회의 전통적 국가론을 19세기 노동문제에 적용한 것이라고 파악함이 더욱 정확하다.
교황의 두번재 해결책은 노동조합의 육성이다. 그는 노동조합의 필요성과 그것을 결성할 권리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사용자와 노동자는 어려운 입장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단체 및 사회의 두 계층을 서로 접근시킬 수 있는 조직을 활용하여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 해결에 스스로 적극 참여할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단체는 노동조합이다”(68-69항) “이러한 조직을 결성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이기 때문에, 국가는 그 자연권을 보호해야 하고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72항)
세계 어느 국가도 아직 노동자만으로 구성된 노동조합을 합법화하지 못하고 있던 1891년에 레오 13세는 노조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노조의 결성과 가입이 기본권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이미 없어진 중세기의 길드를 재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산업사회가 산출한 새로운 조직인 노동조합을 정당시하고 지지하였다.
헌장의 효과
불행히도 자본가·노동자 그리고 성직자중 많은 이들이 이선 헌장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는 회칙이 거의 읽혀 지지 못하였다. 그것을 읽은 상당수의 사회인사나 교회 신자들도 그 내용을 쉽게 수용하지 않고 비방하였다. 그러나 그 헌장은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노동자의 고통을 줄여주고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일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40주년에 반포된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 「사십주년」 제1부에는 「노동헌장」의 성과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첫째로, 헌장의 반포로 인해서 교회의 사회교리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많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며 발전시키고 출판물이나 강좌를 통해서 그 내용을 보급하였다. 그 결과로 사회교리가 교회 내외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노동문제의 해결책 선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둘째로 노동조합 운동을 사회주의적 혁명의 일부가 아닐까 해서 두려움이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이들의 마음을 헌장이 완전히 안심시켰기 때문에 수많은 성직자와 평신도가 노동조합 결성에 도처에서 헌신하게 되었고 노동자 교육에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헌장은 노동조합의 육성과 노동자 지도자 양성에 현저한 박차를 가했다. 그 이후에 무수한 노동조합의 지도자 양성기구가 출연하였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가톨릭노동청년회(J.O.C)는 1925년에 벨지움의 까르뎅 신부가 창립했지만 그것도 틀림없이 「노동헌장」의 열매이다.
셋째로, 헌장이 반포된 후에 먼저 유럽 각국에서 조금 늦게 미국에서 각종 노동문제, 부녀자와 어린이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동관계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관정에서 「노동헌장」은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헌장은 영향력 있는 관계법을 제정하는데 많은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중에서도 일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에서 히츠(Hjtze) 신부의 활동과 일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에서 라이안(Ryan) 신부의 활동은 특기할 가치가 있다.
독일과 미국은 세계 각국의 노동관계법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특별히 중요하다. 리에즈학파의 일원, 뮌헨대학의 교수, 그리고 독일의회의 의원이었던 히츠신부는 「노동헌장」의 반포 이후 30년 동안 독일에서 노동관계법 제정의 기수의 역할을 하였는가 하면, 라이안 신부는 1930년대에 노동관계법이 미국 뉴딜정책의 일부로 입법되는 일에 뚜렷한 공적을 통해서 「노동헌장」의 영향을 받아가며 제정된 독일과 미국의 노동관계법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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