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온 인류는 또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어 본다. 그러나 아무리 부푼 희망일지라도 이 지상에 평화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꿈에 불과할 것이다. 인류의 모든 희망이 이루어 지기위해서도 이 세상에 먼저 와야 할 것은 평화다. 그래서 성교회에서는 1월 1일을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하느님이 축복하는 평화라야 한다.
우리는 결코 거짓된 위장된 평화라든가, 어떠한 힘에 굴복하는 노예의 평화도 안 된다. 비겁한 자들의 일시적인 도피적 비굴한 평화여서는 더욱 안 된다.
그래서 오늘의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지시하신 ‘사제의 축복’을 전한다.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 주시고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
이 사제의 축복은 성경전체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축복시(祝福詩)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며 아끼시고 복을 내리시는가를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행복·평화·수호·사랑 등이 넘치는 축복이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이 축복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세상은 아직도 하느님의 축복보다는 이 세속이 주는 거짓된 영화나 재부, 권력이나 쾌락 등을 더 좋아한다. 여기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축복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은 아기 예수의 할례에 대해 전해준다.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기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예수’라고 지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곧 ‘하느님은 구원’이심을 알리는 이름이다. 예수라는 이름에 는 그분의 본성과 사명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이름은 교회에서뿐 아니라 만백성이 환희와 함께 엄숙하게 축하해야 할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할”(필립 2 : 9-11) 이름이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은 예수라는 이름아래 무릎을 꿇지 않고 있다. 가치관이 확립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세속을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3명의 벗을 사귀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왕이 그를 소환해서 그의 행위를 따지려 했다. 그 친구는 다급한 나머지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첫째 벗에게 그런 사정을 말하면서, 왕에게 자신을 변호해주기를 간청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말았다. “자네는 나 때문에 많은 죄를 지었고 헛된 시간을 보냈다고 하지만 언제 내가 자네에게 그것을 강요했나? 자네 혼자서 나한테 미쳤을 뿐이지, 나는 모르네.” 그래서 둘째 벗에게 찾아가 왕에게 변호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둘째 벗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나를 사랑한 것은 나도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건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우리는 당신께 강요한 일은 없어요. 그러나 지난날의 정리 (情理) 로 보아 왕궁 앞까지만 동행해 드리지요.” 실망한 그 사람은 평소에 그렇게 친하지도 않던 세 번째 벗에게 가서 염치불구하고 변호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벗은 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세 번째 벗이 없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쓰려 내렸다.
여기에서 왕의 갑작스런 소환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며, 첫째 벗은 이 세상의 돈·권력·쾌락 등이다. 그것이 어떻게 변호할 수 있겠는가? 아주 냉정하게 그의 죽음과 동시에 딴 곳으로 가버리고 만다. 둘째 벗은 ‘가족과 친지’들이다. 죽음을 애도하고 울기는 하겠지만 역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무덤에까지 함께 가주는 일뿐이다. 그러나 셋째 친구는 ‘믿음과 선행’이다. 이는 죽음과도 상관없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느님 앞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벗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과연 올바른 믿음을 가졌느냐이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이비 종교들이 많다.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반성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그대로의 믿음인가? 아니면 변질된 것인가를 항상 되돌아 봐야 한다. 오늘의 제2독서에도 여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자연숭배에 얽매여 종노릇을 하는’ 일이라든가 아직도 율법의 테두리를 벗지 못하고 ‘율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사랑)의 자녀들이다. ‘종’으로서의 억압된 믿음에서 벗어나 ‘아들’로서의 사랑과 자유의 믿음을 살아가야 한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넘치는 축복과 기쁨과 평화, 사랑과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주님을 따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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