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생활의 시작이며 기초는 경외심이다. 인간은 하늘이 두려운 줄 알아야 하고 하늘이 각 사람의 마음 안에 새겨준 양심을 따라 살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이나 자연에 대하여도 삼가는 마음을 가지며 인간다운 사회를 형성한다. 하느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인간을 경멸하고 자연을 훼손하여 인간다운 삶을 파괴하게 된다. 실제로 유물사관(唯物史觀)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는지 인류역사는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거룩함’ ‘위대함’ ‘전능함’을 체험하고 이를 신격화(神格化)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대상에 부복(俯伏)하여 얘를 다하여 섬기고 일정한 의식을 통하여 예배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 그 가호나 축복을 빌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이면 공통으로 의식할 ‘수 있고 인식하는 형태로 묘사하게 되는데 오륜으로 잘 표현된다. 즉 두 무릎을 꿇고 양 손바닥을 땅에 짚으며 머리를 조아려 이마를 땅에 대는 것 혹은 아주 땅에 엎드리는 자세로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적 행위가 곧 종교심이고 경외심이라 평가하기 어렵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만큼 인간의 존엄성과 신성성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공경의 대상으로서의 신은 없고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거나 의식과 형식의 노예가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폭군으로 변할 수 있다. 이는 진정한 의미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다. 외려 하느님의 이름으로 온갖 횡포와 폭력을 자행하였다. 예수님도 경고하며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너희를 쫓아 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짓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마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2-4).
그러므로 종교생활의 기초이며 시작인 경외심은 신분상이나 명칭상의 종교인 이라든지 유신론자와는 관계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온갖 경건하고 겸허하게 수행하며 악을 피하는 자세에서 드러나는 것이다(욥기 28,28). 하느님은 누가 독점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부하여 소멸될 분도 아니다. 진정한 경외심을 가진 자에게는 위로와 희망이 되시는 분이고 거부하는 자에게는 종말에 가서는 엄한 심판을 내리실 두려운 분이 하느님이시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갈라 6,7)
종교인으로서 바른 종교생활을 하려면 그 기초이고 시작인 참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참된 종교심으로서의 경외심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내포한 것이라야 한다.
첫째 경건한 마음이다. 하느님을 거룩하시고 모든 것의 창조주인신 엄위한 분으로 알아 모시는 마음과 인간의 죄스럽고 초라한 모습을 인정하고, 동시에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인간은 고귀한 품위와 위대함을 지낸 존재임을 고백하는 태도이다. 이와 같은 마음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의 고백록에서 “나는 한편 떨리고 한편 화끈해 집니다. 떨리기는 그 분을 닮지 못함이요, 화끈해짐은 그 분을 닮은 까닭이옵니다”(11,9)라고 표현하고 있다.
둘째, 겸허한 자세다. 인간이 누구나 우대하고 품위를 지닌 존재임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이지만 (창세 1,26-28‥시편 8)동시에 각자는 부족하고 죄스런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풍요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겸허한 자세란 자기의 현실적 위기와 사명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개방된 마음이다. 이것이 대인관계에서는 봉사하는 능력이며 인간의 한계성에 부딪칠 때는 구원의 힘이 되는 것이다.
셋째, 순결한 마음이다. 마음이 깨끗하여 온갖 욕심과 욕망에서 해방된 마음이다. 사심 없는 전폭적 신뢰는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게 하며 현세적 유혹이나 협박에서 초연할 수 있으며 진리를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한다(필립 3,8-12). 이는 곧 진리를 발견하고 맛본 마음이다(요한 8,31-22).
우리나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죽음에서 이 진리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 평가와 박해에 대하여 의연할 수 있었다. 무군무부의 패륜자로 자탄을 받으면서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으면서도 신교는 나라의 임금이나 집안의 아버지의 아버지 되시는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을 모시고 공경하는 일이며 이는 대군대부를 알아 모시는 것으로 증언하고 천주교의 계명에도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들께 효도할 것을 가르치는 윤리가 분명히 있어 패륜의 행위가 아니고 대효의 행위임을 떳떳하게 밝히고 참 진리를 옹호하였던 것이다.
종교심이 내포한 경외심은 효심이 극대화이며 인간다운 삶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경외심이 없으면 바른 윤리생활도 기대할 수 없다. 절대자가 배제될 때 모든 것은 상대화되며 모든 것이 상대화될 때에는 공리론(功利論)이나 이념적 절대 명령이나 실정법 위주의 윤리체계 밖에 설 수 없고 힘의 논리, 합리적 적법성 이상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자기 스스로 깨달아 사는 것을 최종·규범으로 삼지 않고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종교적 삶의 모범이 되시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는 윤리이다. 그 분이 볼 수 없는 하느님을 아버지 하느님으로 계시하여 주셨으며 우리는 모두 그 자녀들이고 영원한 생명에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기쁜소식을 전해 주시어 알게 된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정을 갖춘 경외심이다. 그러므로 이는 두렵고 떨리며 동시에 신비적 황홀감을 내포하는 종교심이다(Mysteriumtremendum et fascinos um). 그리스도교의 참 종교심은 자력으로 완성에 이른다고 믿는 뻴라지우스주의도 거부하며, 하느님께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순수피동적 정적주의도 부정한다. 강생과 육화의 신비를 사는 적극성과 함께 인간이 임의로 미룰 수도 앞당길 수도 없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성실히 현재(Kairos)에 순응하는 겸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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