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내탓이오’ 운동이 최근 우리 사회에 알려졌다. 신문의 가십과 만화에서도 ‘내탓이오’를 다루곤 한다.
천주교가 70년대와 80년대에는 사회정의와 민주화운동에 앞장을 섰다. 이러한 운동도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경찰 파출소마다 ‘정의사회 구현’을 큰 글씨로 써서 입구에 내걸었다. 정치계와 법조계에서도 ‘공동선’이니 ‘공권력’이니 하는 말들을 자주 쓰게 되었다.
이 말들은 천주교가 만든 말은 아니고 원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자주 이 개념들을 쓰는 것을 보고 우리 사회가 따라서 쓰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말들을 씀으로써 우리 사회에 과연 ‘사회정의’가 서고 ‘공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되고 ‘공동선’이 촉진 되었던가. 좋은 말을 따라서 사용해 개념을 오염시키거나 희석시키고 사회상은 여전히 혼탁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천주교 평신도 전국협의회가 ‘내탓이오’란 말을 내걸고 있다. 사회 언론지면들이 또 관심을 가지고 이 ‘내탓이오’ 운동을 보도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사회는 또 어떤 결과를 내보일 것인가 다시 이 좋은 말의 뜻을 희석시키고 말 것이 우려된다.
지난날 사회정의와 민주화 운동은 성직계가 앞장서서 했다. 이제 ‘내탓이오’ 운동은 평신도협의회가 앞장서서 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본질적으로 성취하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엔 무엇보다도 ‘사회악’이 극심해 가고 있다.
강도, 성폭행, 일가족 생매장, 이런 끔찍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불안에 떠는 민심을 좀 가라앉히려는 듯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별로 사태가 개선되는 기미가 없다.
이 어두운 세태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민주주의원칙으로 말하자면 한 나라사회의 혼탁은 그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탓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 문민화 민주정착을 이루지 못했으니 국민이 제대로 주인 노릇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어떠한 상태에서든 어두운 세상을 진리의 빛으로 밝힐 본분이 우선 신앙인들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는 아무 죄가 없이도 악한 세상의 벌을 받아들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오늘의 신앙인들이 범죄로 들끓는 세태를 보고 ‘내탓이오’를 외치며 가슴을 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교회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차원의 신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하느님이며 인류를 구원하는 본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신자들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한 이 좋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신분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가 구원한 세상이 다시 죄로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때로는 순교하는 신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용기를 가지고 순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순교도 은총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또 모든 사람들이 의를 위해 순교한다면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이 좋은 세상을 살 주인공들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이 지상에서 살아야 한다. 비록 약한 존재로서나마 사는 것이 본분이다.
그런데 이 세상이 자꾸 혼탁해지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지체인. 성직자들은 용감하게 감옥에도 잘 갔다. 처자식에 얽매인 신자들이 이제 ‘내탓이오’ 운동의 참 뜻은 무엇인가. 원래 천주교 신자들은 미사 때마다 참회 예절 대목에서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며 세 번 가슴을 친다. 그런데 이제 새삼스레 ‘내탓이오’ 운동을 벌이다니. 이제까지 우리가 드린 미사가 다 헛것이었다는 말인가.
큰 도시의 이곳저곳에 너무도 교회가 많다. 천주교 성당도 많이 늘었고 대형화 추세에 있다. 그런데 사회의 범죄는 정비례해서 늘어간다.
해마다 성탄 때면 분단선 남쪽 동산에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선다. 현란한 색 등으로 장식되는 이 트리가 서는 곳은 ‘애기봉’(愛妓峰)이다. 고유의 지명이지만 그 뜻은 ‘기생을 사랑하는 동산’이란 것이다. 거룩한 성탄절 트리를 꼭 이 지점에 세워야 할까. 북녘 동포들이 보고 웃을 것이다.
우리의 눈먼 무의식, 찌들은 타성, 개인적 광신만으로 ‘내탓이오’를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불의에 맞서 희생적 행동을 못하더라도 평신도 지도급 인사들이 민주주의 정통성을 결여한 역대 정권에 시녀가 되어 들어가는 일은 그만해야할 것이다. ‘내탓이오’는 새삼 말로 하기보다 벌써부터 실천적 삶을 통해 증명했어야 했다. 이제부터라도 이 혼탁한 사회에서 소금과 누룩으로 사는 ‘실천’이 바로 ‘내탓이오’ 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