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갖고 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희망은 그 성질상 미래적이지만 미치는 영향은 현실적 삶의 성격을 규정한다. 인간의 삶은 그의 희망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며 윤리적 특성을 규정짓게 되는데 희망도 믿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희망의 대상과 희망하는 사람의 태도로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리스도인 윤리와 생활의 특성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고 또 드러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희망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견딜 따름입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18-26).
위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무엇이며 그 희망을 어떻게 간직하고 살아가는 지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1,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대상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바라는 대상은 생명이신 하느님 곧 영원한 삶이다. 인생의 죽을 생명 속에 씨앗같이 지니고 있는 부활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감이며 하느님을 뵙게 되는 관문이다. 그리고 이는 육신 부활을 내포한다 :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 가느냐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는 것은 장차 이루어질 그 몸이 아니라 밀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그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35-45).
2,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삶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 11,1)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이 희망을 얻고 지탱한다. 희망의 대상에서 드러나듯 부활의 희망을 지향하며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망한 것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현실 도피나 염세주의자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1코린 7,1-40). 이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된 선물이며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되어야하는 과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완성의 그날까지 충실하고 성실하게 간직하며 살아야하는 사명이다.
3,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
영원하신 말씀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사시며(마태 28,20)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실망치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유혹을 받으시고 시련을 겪으시고 완전하게 되시어 우리의 사제가 되신 분이기 때문에(마태 4,1-11:히브 2,17-18:4,15,7-10:2코린 5,13-21) 그 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이 희망을 충실하게 살아가게 되었다(2코린 2,14-17).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위협하는 것들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대상이 육신부활과 영원한 삶이라고 할 때 이와 반대되는 것이 곧 희망을 빼앗아가는 ‘세속’이다. 요한계 문헌과 대상들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좀먹게 된다. 인간이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헛되이 지나가는 피조물에 마음을 두면 희망을 잃게 된다(마태 6,25-34:16, 24-26:19, 16-26).
하느님의 은총과 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우리 희망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이나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내용들(마태 4,1-11:1요한 2,15-17)은 육체적 욕망, 세속의 재화 및 권력 등이다(시편5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간직하고 키워 나아가기 위해서는 육체적 욕망을 억제하고 다스리며 재산이나 권력에 의존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적 건강이나 재산이나 권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와 은총이 우리를 구하기 때문이다.
희망에 어긋나는 행위들
첫째, 희망의 대상을 현세 것에 두는 태도이다. 궁극적 목적을 구원에 두지 않고 건강이나 재산이나 명예, 권력 등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불신앙에 가까운 삶이 된다.
둘째, 실망이나 절망을 하는 태도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에 신뢰치 않고 자기 자신에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의 가장 큰 죄와 불행은 스승을 배신한 것이 아니고 스승께 희망을 두고 돌아오지 않은 행위다(베드로도 스승을 배반했었다)어떤 학자는 이러한 실망죄를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해석한다(마태 3,28-29).
셋째, 과신이나 과망도 참된 희망에 어긋나는 행위다. 자기 자신이 구원되었다는 예정설을 믿거나 자만하는 태도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는 어리석은 행위다(필립 2,12-16:갈라 6,7-10 참조)어떤 학자는 이러한 태도를 성신을 거스른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했다.
참된 희망은 인내와 충실과 겸손의 삶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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