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부터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이것저것 만지다가 컴퓨터가 엉키기도 하고 우뚝 서서 꼼짝도 아니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MS-DOS라는 책을 사다놓고 읽으며 열심히 쳐 보았다. 조금씩 물리가 트이며 이해되기 시작했다. 약간 이해가 가기 시작할 때에 나는 이미 책을 다 읽어 버리고 어느새 프로그램 쪽으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DBASE Ⅲ+를 읽으며 쳐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건방지게도 교적 프로그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웃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언감생심 생각도 말라는 것이었다. 학원도 안 다니고 혼자 책보고 무슨 프로그램을 짜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충고 내지는 콧방귀가 나를 분발시켰다. 드디어 지난 12월 말로 일단 미숙하나마 교적에 관한 모든 프로그램은 완성했다. 교적정리와 교적조회, 전출 및 전입신자현황 등 교구에서 내놓고 있는 모든 양식을 전산화 했다. 이제는 본당재정에 관한 프로그램을 짜기 시작했는데 90%정도는 완성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짜면서 느끼고 배운 것이 너무나 많기에 그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볼까 한다.
첫째 ‘집념이란 무서운 것이다’라는 것을 나 자신 느끼고 놀랐다. 꼭 해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덤벼드니까 우선 잠이 없어진다. 보통 밤2시 3시까지 책을 보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던 날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미사시간을 못 맞춘다든가 늦잠을 자지도 않았다. 오히려 미사시간이 다른 때보다 더 정확해졌다. 저녁미사가 있는 날이면 아침에 실컷 자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오히려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책을 보고 컴퓨터를 만지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때는 미사 때까지도 컴퓨터 생각이 떠나지를 않아서 애를 먹은 적도, 또 실수를 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집념이라면 못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스스로 들기까지 한다. 이러한 집념을 컴퓨터가 끝나면 사목에 반영시키면 아마 일등 사목자가 되리라고 생각해보며 진작 사목에 열중하지 못했던 것이 결국 나 자신의 태만과 게으름 내지는 하고자하는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둘째는 사람이 가장 완전하고 훌륭한 컴퓨터라는 사실이다. 따뜻함이 있고 인정이 있고 이해심과 도량까지 있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컴퓨터인가 하는 생각이다. 컴퓨터에서는 배신감을 자주 느끼게 된다.
정서가 없고 따뜻함이 없고 원리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컴퓨터가 때때로 야속하기도 하고 어느 때엔 배신감마저 들기도 한다.
얼마나 열심히 또 소중히 다루고 거의 하루 종일 밤잠도 설쳐가면서 자기와 만나주고 있었지만 그놈은 자기 직성대로 자기주장대로 자기 원칙대로 안 되면 무조건 반대이고 무조건 오류라고 잔인하게 말한다. 컴퓨터는 인정도 없고 이해심도 전혀 없다.
그럴 때마다 이해심 많고 따뜻함이 있고 사랑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좋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셋째는 피를 말리는 듯한 각고의 노력 끝에 맺혀지는 성취의 열매는 항상 그 고생을 완전히 잊게 하고도 남는 매우 풍요롭고 소중한 체험이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노라면 등짝이 굳어버리는 듯한 통증과 두 손이 쥐가 날듯이 뻐근해짐을 면할 길은 없다. 목이 뻣뻣함은 물론이요 눈도 침침해진다. 그러나 하나의 프로그램을 완성해낼 때마다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어느 기쁨에도 비유가 안 된다. 여기서 나는 가끔씩 십자가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이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연 우리에게 따라올 부활과 영생의 기쁨은 우리가 어렵게 어렵게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 끝에 따라오는 성취의 기쁨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이요 행복은 바로 이 십자가 끝에 따라오는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이러한 피나는 체험을 바탕으로 모든 사목과 복음선포에 달려들어볼 셈이다. 물론 내가 개발한 전산화 시스템을 가지고 신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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