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라면 어느 종교이거나 세 가지 요소를 지니게 마련이다. 첫째로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이나 그 신의 가르침을 바르게 가르치는 내용인 교의(敎義), 둘째로 가르침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마음을 표시하는 예배(禮典儀式) 셋째로 같은 믿음과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이루는 공동체(종교집단 혹은 교회)의 생활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계율(戒律)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통해서 종교 간의 구별이 가능해진다.
인류문화는 불행하게도 종교 간의 우열을 가리거나 경쟁을 하거나 심지어는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까지 겪어왔다. 이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며 비인간적이고 반종교적인가는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다 깨닫고 있는 일이다. 그리하여 종교 간의 투쟁이나 종교인들의 비행에 염증을 느낀 지성인들은 탈종교를 선언한 경우도 있고 타락한 종교인들의 생활로 종교의 속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리하여 인간의 행복과 인간화를 위하여 존재하며 윤리, 도덕을 가르치고 생활하는 종교인들은 많은 경우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잃어 외면당하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민들과 일반 대중에게는 관대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면서도 종교적으로 지도급에 있던 사람들과 정치적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시고 엄하게 책망하신 것도 종교심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또 가져야하는 기대와 희망을 호도하거나 왜곡하여 실망을 안겨준 때문이었음을 알아야 하겠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5-30)라고 감격하며 말씀하신 것은 어느 특수 민족이나 집단에게 하신 것이 아니고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실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사목헌장1)에게 선언하시는 해방의 소식이며 구원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가볍고 편한 멍에’를 지라고 하시는 것은 어떤 새로운 종교나 계율을 선포하시고자 하신 말씀이 아님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어떤 새로운 의식이나 교리를 선포하시어 새로운 종교를 설립하시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이에게 새로운 삶, 새로운 생각으로 현실을 받아들여 현실의 의미를 바로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비록 그것이 불행하고 초라한 여건 일지라도-그것이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이 아니고 구원과 진정한 평화의 길임을 알려 주시며 불굴의 희망과 참된 용기를 가지고 대처할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막연하게 밖에 알지 못하고 흔히는 잘못 공경하는 절대자,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도, 무질서로 가득차고 죄악이 만연한 세상이라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주시고 치유하신다는 진리와 희망을 알려 주시는 말씀이다 (호세아 11,8-9 로마 5,6-11:20).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고 알아 모시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우리에게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해 주시고 그분께로 인도해주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啓示)하려고 택한 사람들 박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이와 같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가 보내신 아드님 예수와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요한복음 사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인간 중심으로 볼 때 이 세상이 정말 희망적이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가? 심문들의 사회면을 보거나 사회고발을 하는 사설들이나 시론(時論)을 보면 희망보다는 불안과 실망을 주는 것들이 지배적이며 좌절과 불행을 알려 줄 뿐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외아드님까지 희생시키는 분”이다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 세상을 보냄을 받은 이 아버지 하느님의 ‘외아드님’ 예수도 당신과 아버지 외에는 알 수 없는 신비며 진리임을 천명하시고 그러나 이 진리는 현세를 사는 인간에게 구원과 생명임을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도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구세주)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2-3)
위를 종합하여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되는 진리나 생활규범은 어떤 새로운 것이기 보다는 본시 세상의 질서(千理에 대한 順理)를 세우고 완성시키는 일을 하셨음을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하늘의 뜻 자체이시며 스승으로서 인생길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앞서 가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두움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12,46-47) “어두움 속을 헤매는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다. 캄캄한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쳐 올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태어날 한 아기, 우리에게 주시는 아드님”(이사야 9,1-6)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디도 2,11) 그리하여 불멸의 태양신을 숭배하던 12월 25일이 로마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예수 성탄축일(聖誕祝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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