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어느 민족이든 멸망하기를 원하시지 않고 모든 천하 만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그러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전할 일꾼을 필요로 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길을 명시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명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함도 아니요 하느님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오직 인간들의 행복을 위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인간의 행복과 하느님의 사랑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부모님의 사랑을 저버림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임이 곧 자녀들의 행복이요, 자녀들의 행복이 곧 부모님들의 영광이며 행복이다. 하느님께서 이간을 사랑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시편 8,4)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3-17)
제1독서에서의 니느웨는 유다나라와 원수지간이었다. 그래서 요나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는 원수나라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기 위해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그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그렇게 인간적인 감정에 의해 좌우될 수가 없다. 요나는 풍랑을 만났고 물속에 던져졌으며 고래에 먹혀 그 뱃속에 3일 동안 갇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다음에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니느웨는 요나가 전하는 말씀, 즉 “40일이 지나면 느니웨는 멸망하게 된다”는 전갈을 듣고는 즉시 “사람들은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다” 하느님은 저들의 그런 회개함을 보시고 재앙을 거두시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는 어떤 민족에 대해서든 차별대우 하시지 않고 올바르게 살려는 성실성을 지니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알리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그런 뜻을)알아 들을 수 있겠는가?”(로마 10:14) 그래서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그러기에 어부 시몬(베드로)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는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리고 다시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역시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그들을 부르시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데오와 삯군들을 배에 남겨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
주님을 따르는 영광, 주님과 더불어 아버지 일을 한다는 기쁨, 이 세상에 하늘의 빛을 밝힌다는 복된 삶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다.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신자들은 이 행복 속에서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의 환희를 누리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헛된 영화나 부귀나 명예 따위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의 제2독서에서 아름다운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기쁜 일이 있는 가람은 기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물건을 산 사람은 그 물건을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세상과 거래하는 사람은 세상과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가 보는 이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육신으로서 이 세상에 머무를 때는 얼마 되지 않는다. 길어야 1백년이다. 하물며 복음을 전할 시간은 더욱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도 결코 뒤로 미룰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영광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야 한다. 지체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항상 유동적이고 역동적이다. 무엇 하나 안정된 것이 없고, 항구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허무주의적인 독백이 아니다.
우리는 헛된 것과 참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쓸데없는 허상(虛相)이 실상(實相)으로 보이고, 참으로 진실된 것(참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라는 말씀이다. 이 세상 그 어떠한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대저 이 세상 것은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그 말씀만이 영원한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말 (하느님의 말씀) 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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