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예전에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브 1,1-2)즉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 예수를 통해서 당신의 결정적 뜻을 나타내시었으며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그분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친히 삶으로 보여 주셨다. 그것은 그가 가르쳐 준 주의 기도에서 잘 표현되듯이 (마태 6,9-13) 아버지 뜻을 추구하는 것이며 (요한 4,32-34) 그의 뜻을 따라 온전히 순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멜키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히브 5,7-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도 발견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4,6-7)라고 대답하신다.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종교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화되고 완전한 종교신심이다. 인간에 내재하는 공통적 종교심성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알아듣고 믿음으로 위격적 상봉을 가능케 하였다.
둘째,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와 합일을 이루는 신심이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받아주시어 화해하시고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마음을 찾아 주셨다(2고린 5,14-21 : 에페 2,12-22).
셋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참된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자녀로 받아주셨음 같이 서로는 형제적 사랑과 관용으로 받아들이기를 촉구하셨다(마태 5,43-48 : 루카 6,27-38), 그리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들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9)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사회의 차등과 갈등과 분열은 극복되었다. “여러분은 모두 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6-28). 이와 같은 화해와 일치의 삶은 이간의 죄 때문에 신음하고 파괴되는 피조물, 하느님의 자녀들이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자연과도 화합하게 되어 창조질서의 회복과 보존에 이르며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로마 8.19-30)
넷째, 그리스도를 닮은 이러한 삶은 인간의 노력으로써 이 세상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원리며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완성되는 희망의 삶이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골로 3,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이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살라고 명령하시며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증인이었듯이 인류의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사도 1,26)
이를 충실히 지킨 사도 바울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듯이 여러분은 나를 따르시오’(I 고린 11,1:4,16)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따른다는 것은 일반적 의미의 사제지간 관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랍비와 그 제자들의 관계와 비교하여보면 잘 드러난다. 스승과 제자의 일반적 관계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직접 제자들을 선택하셨다.(요한 15,16), 랍비들은 토라(율법)와 전통을 가르쳤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배워야했다(마태 5.17-7,29). 랍비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성장과 성숙의 과정으로 한 학파나 스승을 찾았고 배웠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과정으로서가 아니고 제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즉 스승보다 나아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스승 없이는 삶이 없기 때문이다. 랍비의 제자들이 ‘할라카’와 ‘학가다’를 열심히 배워 익혀야 했다면 예수의 제자들은 ‘하느님나라’를 배워 익혀야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운명체가 되어 구원되는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셨듯이 제자들도 자신을 스승께 온전히 봉헌하여 하나의 운명공동체를 이루게 왼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 가지 유혹을 당하신 것을(마태4, 1-11) 상기하면 바른 신앙생활을 위협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인간은 쉽게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하느님보다 더 신뢰하게 된다. 그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가셨으며 당신의 승리의 길에 동참하라고 초대하신다(I고린 2,14-17). 현실에 충실하지만 동시에 초연해야 하고 산상수훈에서 배운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때에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는 삶이”(I데살 5,16-18) 되고 참 그리스도인으로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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