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최초의 제자 4명(시몬과 안드레아, 요한과 야고보)과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곳 회당에서 안식일을 맞아 가르치셨다(마르코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 모인 청중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는 사실과 또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예수님의 설교내용은 이미 명백하다.
그것은 곧 인간의 언어를 초월한 천상의 것임을 드러낸다. 사실인간의 언어로써 어떻게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 말씀의 권위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이 있다가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예수께서는 다만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는 한마디 명령의 말씀으로써, 그 누구도 어쩌지 못했던 악령을 추방하신다.
그럼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오늘의 제1독서는 그에 대한 해답을 잘 말해준다. “나(야훼)는 네 (모세) 동족가운데서…너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키리라. 내가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주리니, 그는 나에게서 지시받은 것을 그대로 다 일러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조금도 왜곡됨이 없이 그대로 전하셨기 때문이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이나 제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경전의 문자에만 사로잡혀 그것들을 자기 뜻대로 해석함으로써, 환희에 넘쳐야 할 신앙을, 무거운 짐으로 바꾸어 놓았었다. 생명력 없는 엄한 율법과 조직과 전통만을 내세우는 바리사이들의 그러한 헛된 이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런데 깊은 감동에 이어 더 강한 인상은 더러운 악령이 추방된 일이다.
더러운 악령이란 인간 이하의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하는 그런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사회도체에서 이런 더러운 악령이 우글거림을 본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흉악범은 물론이요, 겉으로는 아닌척하면서도 그 내면에는 인간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갖은 음모와 악행을 꾸미고 있다. 아무튼 인간으로서 정도(正道)에서 벗어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데 그 책임은 바로 우리들에게도 있다. 즉 우리가 오늘의 복음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빛이 되지 못했기에, 그 옛날 우리 주님께서 더러운 악령이 제 발로 물러가도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악과의 대적(對敵)을 원하시지 않고, 선으로써 악을 굴복시킬 것을 원하신다. 악은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서 사라진다. 어둠은 빛이 자기 앞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일이며,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자취를 감추고 만다. 악령은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 사라지고, 악의 나라는 멸망케 된다. 예수님은 단 한마디 말씀,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는 명령으로 악령을 추방한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군중들의 반응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율법에 묶여 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저희들끼리 수군거릴 뿐이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우리는 이 권위 있는 새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것을 다만 아득한 2천년 전의 옛 일로만 기억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 우리의 시대에, 우리 사람의 현장에서도 이 권위 있는 가르침이 전해져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진정 예언자란 단지 미래의 일을 미리 알리는 그것이 아니라(豫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바를 그대로 말하는 예언자(豫言者)임을 기억하자. 하느님의 권위, 하느님의 능력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위임받은 자로서 권위 있게 행할 때, 오늘날에도 더러운 악령은 소리치며 떠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 제2독서에서, 주님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결혼을 했다고 해서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또 주님의 말씀을 다르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결혼한 자들이 독신생활을 하는 자들을 따라갈 수 없다고 근심걱정 할 것이 아니라(32절) 기혼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즉 “여러분이 아름답게 살며, 딴 생각 없이 오직 주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것”(35절)이다.
우리의 삶이 주님만을 섬기며, 주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생활이 될 때, 이세상의 더러운 악령들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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