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대목 4천명을 먹인 기적의 빵증식이야기는 그 이전에 있은 5천명을 먹인 빵의 증식기적이야기와(마르 6,34-44) 비슷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두 이야기가 같은 한 사건을 기초로 하여 전해진 마르코적인 전통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복음서를 있는 그대로를 읽으면서 두 시간을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드러난다. 우선 두 사건을 둘러싼 환경을 비교해 보자.
①빵의 증식기점 : 5천명(마르 6,31-44:4천명)(마르 8,1-9)
②기적 후 호수를 건넘(6,45-52과 8,10)
③겐네사렛(6,53-56)과 달마누타(8,10)에 상륙,
④바리사이파인들과 토론(7,1-23과 8,11-13)
⑤빵에 관하여 시로페니키아 여인과(7,24-30) 제자들과(8,14-21)의 대화
⑥귀먹은 벙어리(7,31-37)와 소경(8,22-26)의 치유
이외에도 두 이야기는 큰 짜임새로 봐서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 군중들과의 공동식사, 빵을 나누기전의 축복기도, 식사 후 군중을 돌려보냄 등 내용의 구성이 비슷하다. 그렇다면 복음사가들은 왜 같은 사건을 두 번 중복하여 복음서에 써넣었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더군다나 4천명의 급식사건이 있은 후 예수의 그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갈 때 제자들이 빵을 잊어버리고 가져 오지 못한 것을 걱정할 때 “너희는 눈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느냐? 벌써 다 잊어 버렸느냐! 빵 다섯 개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고 빵 일곱 개를 가지고 4천명에게 나누어 먹이고도 일곱 바구니나 남았는데 아직도 못 깨닫느냐?”하는 기사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마르 8,14-21 ; 마태 16,5-12) 마르코와 마태오는 이 두 사건을 분명히 따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의 말대로 5천명의 빵증식 기적과 4천명의 빵증식 기적은 역사적으로 같은 한 사건을 두 번 다르게 기술했을지는 모르지만 복음사가들이 의도적으로 다른 두 사건으로 기술한 것은 틀림없다고 본다.
비슷한 사건을 두 번 따로 소개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5천명의 경우는 유대아계통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한 교리교육적 목적이고 4천명의 경우는 이교도계통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한 교리교육이다.
본문을 검토해 보자. 군중이 예수를 따른다. 그들은 사흘이나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먹을 것이 떨어져 난처하게 되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셨고 제자들과 그 해결책을 의논하신다. 군중은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다. 여기서 삼일동안 무엇을 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삼일은 하느님의 도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도움은 삼일 후에 내린다(창세 40,13 ; 여호 1,11)
예수의 연민의 정은 5천명의 경우는 목자 잃은 양떼 같아서라는 영성적 동기였고 4천명의 경우는 가다가 지쳐버릴지 모른다는 현세생활에 관한 동기였다. ‘먼데서온 사람들’이란 표현은 사도교회에서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에페 2,12·17 ; 사도 2,39: 22,21)
제자들의 대답은 우리들을 당황케 한다. “이 광야에서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빵의 증식에서 빵 다섯 개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인 기적을 본 제자들이 어떻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을까. 그것은 첫째 복음사가가 제자들의 몽매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구세주 예수의 본의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과연 4천명의 급식기적 후 그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한데 대한 책망을 들었다.
제자들의 우문에 대한 둘째 해답은 광야에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만나로 배불리 먹이신 성서기사를(탈출 16,32)회상시키는 문구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의 물음을 다음과 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이 광야에서 이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빵을 구할 수 있는 분은 당신뿐이 아닙니까”라고.
이번에는 빵 일곱 개를 가지고 4천명을 먹였다. 전번에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였다면 4천명을 먹이려면 빵 네 개면 족하였을텐데 주께서는 빵 7개를 다 썼다. 그것은 있는 것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들을 먹이시는 하느님의 뜻을 표시하는 것뿐이다. 빵 7개는 사도시대의 7집사(부제)를 나타내고 4천명의 4는 세계의 4방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 7바구니는 묵시록의 7교회(1장)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첫 번 기적에서는 먹고 남은 조각을 모은 그릇을 광주리라 하였고 두 번째는 바구니라 하였는데 광주리는 유대아인들의 용어이고 바구니는 이방 그리스인들의 용어이다.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울리고 쪼개어 주는 행위는 사도교회에서 성찬예식을 할 때 사용하는 전례적 용어이다. 주님의 최후만찬에서 그렇게 하였고 사도들도 같은 말을 하면서 성찬식을 하였다. (고린 전 11,24)
배불리 먹이신 다음 사람들을 보내신 것은 성찬미사가 끝난 다음 회중을 보내는 마지막 전례의 말을 연상시킨다. 이일이 있은 후제자들과 달마누타로 가셨다고 했는데 이 지방 이름이 어디인지 현재로는 알 길이 없고 마태오는 마가단지방으로 가셨다고 했는데 이곳도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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