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신학에 있어 믿음의 길을 논할때 두가지 측면을 고찰하게 된다. 그하나는 믿는 마음과 믿음의 근거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믿는 내용이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누구나 참된 종교심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느님께 전폭적 신뢰를 해야하며(이사야 7, 9)하느님이 이간에게 구원의 길로서 계시하신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전폭적 신뢰의 바탕이며 기초가 되는 진리는 전통적으로 사도신경(使徒信經)안에 요약된 내용들이다.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 구세주이신 예수그리스도, 성화의 능력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구원론적 내용으로 교회와 죄의 용서와 영원한 삶이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시간의 시작이고 마침이시며 자유의지를 받은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최종 심판을 내리시어 옳은 행위에는 상을, 그릇된 행동에는 벌을 주시리라는 것을믿고 그러한 신앙과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답게 윤리적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실행이 따라야 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보2, 14)
「믿음의 길」에 포함된 내용
가, 믿는 마음을 발해야 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구원의 하느님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신명기 6,4). 인간이 하느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을 때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없으며 만나지 못할 때 믿을 수 없다.
나, 마음으로 믿는 바를 말과 행동으로 고백해야 한다. 우정이나 애정이 이웃에게 고백되듯 자기가 신앙인임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누구든지 사람들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마태 10, 32-33).
다, 믿는 이는 선교의 의무를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께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셨듯이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셨다(사도1, 8). 선교지가 따로 있지 않고 이 세상 생활현장이 곧 선교의 현장인 것이다. 예수의 일생이 아버지의 뜻을 전달하는 삶이었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보여주는 삶,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어야 하며 이것이 원초적 선교사명이다.
라, 믿는 이에게는 교리 공부의 의무가 있다. 넓은 의미로서의 교리공부란 진리에 대한 추구를 의미하며 좁은 의미로는 계시진리에 대한 공부를 뜻한다.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교육을 계속 받아야 한듯 신앙인도 신분과 직장과 사회적 사명에 따라 그에 상응한 교리지식을 함양할 책임을 갖는다. 현세 생활에 있어 무지와 오류가 바른 생활을 할 수 없게 하듯 바르고 필요한 교리지식이 없이는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없기 마련이다.
마, 믿는 이는 신앙을 옹호할 책임도 진다. 건강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을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신앙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을 피하고 신앙을 해치는 것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신앙을 보호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에는 교회가 금서 목록을 만들고 영화의 등급을 마련하는 등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보호하고 도왔으나 이제는 신자들 각자 스스로 경계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개인과 신앙옹호 뿐 아니라 공동체적 신앙생활 증진에도 힘써야 한다. 자신의 신앙이나 교회 공동체의 건전한 발전과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의 신앙 공동체가 되도록 적극 협력해야 하며 건전한 교리의 옹호를 위하여 교회가 가르치는 교도권에 순응하고 옹호할 의무를 게을리하여도 안된다.
믿음에 위배되는 행위들
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하느님을 거부하는 태도의 생활이다. 즉 투쟁적이거나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다.
나, 배교와 열교의 잘못을 저지르는 삶이 있다. 자기의 신앙을 거부하거나 믿을 교리의 일부를 왜곡하거나 부정하는 경우를 말한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선교의 과정에서나 신앙생활에 있어 종교박해라든지 극복하지 못한 토속신앙,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로 배교나 열교나 이교(離敎)의 잘못을 범하게 된다
다, 무분별주의나 절충주의의 잘못이 생길 수 있다. 진리에는 절충이나 타협이 있어서는 안된다. 신앙의 결단과 순응이 요구되는 처지에서 편이주의나 합리주의적 해결을 시도하는 태도는 종교간의 대화나 관용과 다른 것이다. 자기의 신앙적 확신이 있을 때 상호간의 존중과 대화도 가능한 것이며 진정한 종교간의 만남이 가능하겠다.
라, 믿음에 대한 회의와 믿을 교리를 의심하는 것은 신앙에 위배된다. 여기서 회의나 의심은 믿음의 어려움과는 구별된다. 인간의 지성과 능력의 한계성때문에 신앙 진리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인간의 조건이므로 잘못이 아니다. 다만 자기 중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하여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의 회의와 의심을 말한다면 그는 실제로 불신앙과 같은 것이다. 믿음은 이와같은 시련을 극복하려는 끈기와 위대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신뢰함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마르5, 1~5). 아우구스티노 성인의『나는 믿기 위하여 배우겠으나 배우기 위하여 믿겠다』란 명언을 생각해야 한다.
마, 신앙의 신비와 인간 지성의 한계성을 소홀히 하고 자기 만족이나 자기확신에 사로잡히는 생활태도는 신앙을 속화시키거나 타인에게 믿음을 강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꿈, 현시, 방언, 이적 등을 추구하며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믿음에 따르는 고난과 어두움을 회피하면 혼란과 비행과 불륜을 서슴치 않는 사이비 종교생활에 빠지기 쉽다. 타인을 단죄하고 아집에 사로잡혀 광신적이거나 비현실적 생활태도에 빠지는 오류를 범한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도 신뢰심도 부족하며 안이하게 현실을 추구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왜곡하는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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