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한국성지연구원과 세호항공여행사 후원으로 수원가톨릭톨릭대학 하성래 교수가 답사한 임진왜란당시 일본으로 끌려한 한국인 순교자의 발자취를 5회에 걸쳐 게재한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 7년 동안 일본으로 잡혀간 한국인 포로의 수는 줄잡아 5만을 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책에는 70만이라고 기록된 곳도 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천주교를 신앙하였고 어떤 이는 노예로 팔려 멀리 서양으로 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도공(陶工)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순교를 하여 성인 혹은 복자위에 오른 분도 있으며, 오따 줄리아와 같이 섬의 수호신으로 오늘날까지 섬김을 받는 분도 있다. 필자는 일찍부터 이들의 천주교 신앙과 순교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발자취를 한번 더듬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이번에 한국 성지연구원과 세호항공여행사의 후원을 얻어 한종오(성황석두 루가서원 사장) 김종표(세호항공여행사 대표)씨와 함께 그 발자취를 추적 답사하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웅천(熊川 : 속칭 곰개)을 찾아서
우리는 포로들이 잡혀간 항구 중에서 비교적 옛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경남 진해시 남문동 웅천 남산 왜성(倭城)부터 먼저 답사래 보기로 하였다. 1991년 1월 22일 웅천에 도착한 우리는 웅천공소 김금석(비오·1919년생) 회장의 안내를 받아, 옛날 항구가 있던 웅포 마을은 현재 한 20호쯤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있었다. 김회장은 옛날엔 현재위치보다 약 2백m 안쪽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논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한 가운데는 큰 당산나무가 있어 그 옛날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는 듯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어촌 마을이었다. 문득 내 마음속에서는 “그래 여기가 우리 동포가 울부짖으며 포로로 잡혀가던, 그 한 많은 웅포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귓가에 그날의 그 울부짖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듯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에는 포르투갈의 노예선이 들어와 일본 사람들을 노예로 사갔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포로라는 이름으로 우리 동포를 남녀노소 없이 무자비하게 잡아다가 그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노예로 마구 팔아넘긴 것이다. 사실 포로란 전쟁에 패하여 적군에게 붙잡힌 군인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은 군인보다는 양민이 더 많기 때문에 포로라기보다는 ‘피납자’들인 것이다.
“남녀를 노예로 사가지고 새끼로 머리를 묶어 모아서 앞세워 놓고 뒤에서 회초리로 후리치네, 이처럼 노예를 사 모아서 원숭이를 묶어서 끌고 가듯 소나 말에 매달아 짐짝처럼 싣고 가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종군한 교넹(慶念)이란 일본 중이 읊은 시이다. 이 시를 보면 그 때 포로로 잡혀간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학대를 받으며 끌려갔나를 조금은 알 수 있다.
웅포 건너 마을이 왜성(倭城) 마을이다. 약 10여 호 되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 뒷산에 남산 왜성이 있다. 한 많은 원혼들의 눈물인양 하늘에서는 때 아닌 가랑비가 내렸다. 김회장의 안내를 받아 가랑비에 옷섶을 적시며 가파른 산등성이를 올라갔다. 산 중턱에 남산 왜성 안내판이 서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왜성의 길이는 8백m라 한다. 토끼나 노루를 잡기 위해 홀치기가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나는 그 홀치기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였다.
조금 올라가니, 산의 능선을 따라 동서로 뻗은 성의 양날개가 나왔다. 검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 이었다. 본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우리 성이었는데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 가 일본 양식으로 개축한 전형적 왜성이라 한다. 사방이 황토산인데 어디서 이런 돌을 가져다가 성을 쌓았을까, 그리고 그때 포로로 잡힌 우리 동포가 성을 쌓느라 얼마나 고통을 겪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왔다. 산의 정상을 오르니, 낚싯대로 좋은 산죽(山竹)이 자라고 있었다.
성의 양식이 우리 성과는 다르다. 우리 성은 남한산성과 같이 능선을 따라 둥글게 쌓아 성 안으로 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성은 우리 성과 같이 둥글게 쌓은 것이 아니라 능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쌓여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서쪽은 가파른 벼랑 밑에 남해 바다가 있어 배수의 진을 친 천연의 요새다.
아군과 명나라 원군에 밀리어 퇴각한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와 그 사위인 쇼 요시도모(宗義智) 의 군대가 이 성에 머물렀었다. 왜군은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사기를 앙양할 방책의 일환으로 천주교인인 고니시 유끼나가는 일본에 있던 포르투갈인인 예수회 소속 세스페데스(Cespedes) 신부를 초청하였다. 그는 대마도를 거쳐 1593년 12월 28일 이 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 군인들에게 세례도 주고 고해성사도 베풀고 미사도 봉헌해 주었다. 그가 한국에 와서 비록 전교는 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우리나라에 최초로 발을 디딘 서양 선교사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김회장에게 옛날 도자기를 굽던 곳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김회장은 남쪽 맞은 편 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 고압선 철탑이 지나가는 그 아래 소나무발이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잡혀간 도공들이 일본에 가서 저 유명한 ‘히라또야끼(平戶燒) 도자기’를 구워낸 것이다. 그리고 웅산신당 (熊山神堂) 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김회장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웅산신당은 웅산의 산정에 있으며 매년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산에서 내려와 제사를 드린다고 하였다. 웅천에서 잡혀간 도공들은 일본 히라또에 가서 도자기를 구우면서도 고향을 잊지 못해 ‘웅천명신(熊川明神)’의 사당을 지어 놓고 제사를 지내었다 한다. 우리는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산을 내려와 나가사키로 가기 위해 진해로 들어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