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시작은 마음의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의 회개는 신뢰심과 사랑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인간에 있어서 욕심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순수성은 행복의 기초입니다.
저는 강론 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이 마음의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해보지만, 언제나 대답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없는 것 없이 부유하게 살면서, 마음이 이기적이고 욕구불만에 꽉 차 있을 때 행복합니까 아니면 불행합니까 하고 물으면, 대답은 한사람 예외 없이 불행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제 반대로 남이 밥을 먹을 때 나도 겨우 밥 먹고 살면서 물질적으로 좀 어렵더라도 마음이 기쁘고 평화스러울 때 행복합니까 불행합니까 하고 물으면 역시 대답은 한결같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은 인간의 행복은 결국「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스러울 때가 많다는 여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언젠가 피정 때문에 서울서 대전까지 고속버스를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옆자리에 앉은 할머님은 다리를 내리고 흔들거리는 버스에 앉으신 것이 불안해서인지 출발 후 조금 있으니까 두 다리를 아예 안방에 앉으시듯 모두 의자 위로 올려놓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깐 자연히 그 좁은 좌석에서 나는 옆으로 밀리게 되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할머님보고 다리를 치우라고 떠밀어 붙일 수도 없어 마음이 매우 언짢아졌습니다.
무슨 할머님이 공중도덕도 없이 남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시는가 하고 속으로 불평했지만 ‘찍’ 소리 못하고 가는 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5분간 지나서일까 그 할머님은 묵주를 꺼내어 로사리오기도를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의 불평이나 미운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내가 참아야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변하고 간사스러운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나도 조금 있다가 묵주를 꺼내어 기도를 시작했더니 할머님이 그제야 자리를 조금 줄이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좋게도 보이고 밉게도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인격의 원천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마음은 양심의 율법이 기록되는 곳이며 사랑의 친교를 맺는 장소라고 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의 순수성이 물질의 노예 상태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루는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중간에서 들어오지 못해 계속 신호를 보내는 사람을 보고 그 차를 제 차 앞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내 앞에 들어온 차는 다른 차가 좀 들어오려고 해도 뒤따라가면서 보니까 결코 넣어주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도 얼마 전에 들어오지 못해 미안해했던 기색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나만 살고 보겠다’는 여유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모습에서 제 마음은 우울했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구세사의 흐름에서 가장 큰 줄기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큼직큼직한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같은 큰 예언자들을 보내시면서, 이스라엘의 뚫어진 마음, 딱딱하게 굳은 마음, 닫힌 마음을 계속 질타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계속 줄기차게 ‘새로운 마음’ ‘살의 마음’을 불어 넣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서에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즉 인간의 8가지 행복은 마음의 문제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행동을 보고 그 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동양사상에서도 효심은 효경을 보고 안다고 했습니다. 섬기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순수하고 정직해야 할 마음이 겉 다르고 속 다르듯이 말과 행동에서 다르게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중인격자라고 말합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며 하느님을 섬기지만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들어가는 것은 깨끗한데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습니다. 시기, 질투, 모함 등등의 부정적인 것들이 마음이 삐뚤어진 것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회개는 자기의 행복과 깊이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비뚤어진 마음은 계량을 따라 걷는다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자기의 것이고, 자기가 스스로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자기 가까이 자기 안에 있다는 말의 진심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오랜만에 어느 수녀원을 방문했습니다. 손님을 담당하는 수녀님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에 앉으니 수녀님이 무엇을 드릴까요 하고 물어왔습니다. 원래 장난끼가 많은 나는 ‘수녀님 마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수녀님의 얼굴은 붉어지고 조금 있더니 수녀님의 말씀이 그것은 예수님께 드렸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을 그림 그리며, 그리고 이 하트는 사랑의 상징이라고 하면서, 마음 없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느냐고 되물었더니, 한참 서있던 수녀님은 ‘그러면 신부님께 마음을 드린다’고 하면서 수녀원 안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습니다.
마음 없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착각이거나 거짓입니다. 옛날에는 착각은 자유라고 했지만 5공 땐 착각은 노망의 지름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도 발전해서 요즘 6공의 착각은 제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마음과 사랑은 실과 바늘처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 영성에서 마음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정화시키고 키워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마음의 정화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 안에서 뿌리 내리고 정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애덕을 통해서 마음을 넓혀가고 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사랑하는 만큼 마음은 커갑니다. 사랑의 덕을 실천하지 않고 마음을 키워가겠다면 이것 역시 큰 착각입니다.
옛날에는 눈을 흘길 때에 그냥 눈을 뜬 채 흘기므로 남이 보기에 흉하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발전하는 세상이라서 이 눈 흘기는 것도 발전해서 요즈음엔 눈을 흘긴 때는 눈을 감고 흘긴 후에 눈을 뜬다고 합니다. 은밀한 것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마음의 부정도 그리고 눈을 감고 흘기는 것도 보이지는 않겠지만 좀 적게 흘기면서 순수한 마음을 갖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기의 마음의 순수성을 하느님 앞에서 키워 가도록 모두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우리에게 풍성히 주실 것입니다. 수난과 부활에의 참여는 마음의 회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회개는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단점들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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