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문명의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것의 노예가 되기까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즉 제1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가 대신하여 빈부의 격차와 함께 계급사회(노동자와 자본가)를 형성했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세력으로 세계는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인간의 두뇌를 기계가 대신하는 컴퓨터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노동자도 자본가도 똑같이 인간성 그 자체가 상실되어 버린다. 즉 인간은 이제 기계의 부속품 정도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데 오늘날의 비극이 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아주 교묘하게 인간세상을 정복해간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늘 깨어 있어야”마태 25,15 참조)한다. 오늘의 복음에서도 주님께서 유혹을 받으심으로써 유혹이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그 엄청난 유혹을 이기고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가져올 것인가를 간곡히 들려주신다. 첫 번째 유혹은 탐욕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이 탐욕으로 해서 무수한 죄를 짓고 타락해 간다. 특히 이 탐욕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원색적이고도 직접적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 40일간 단식한 분에게 빵이라는 말 그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유혹이다. 옛말에도 ‘어떤 슬픔보다도 배고픈 슬픔 보다 더 큰 것은 없다’고 했다. 누구든 생각 없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유혹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이용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고 단연히 거절하신다.
우리는 이 대목을 자주 혼돈하거나 오해하는 일이 많다. 하느님은 물질을 거부하시는 것이라 잘못 인식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물질이 나쁜 것이라면 결코 창조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결코 물질은 나쁜 것도 아니며, 거부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물질의 순서를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외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그 밖의)모든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물질적인 것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의(義)보다 앞세우는 것이 나쁠 뿐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항상 그 순서를 뒤바꾸어왔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편을 사랑하거나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그런데 온통 이 세상은 물질만을 섬기고 있다. 하느님을 뒷전으로 하고 물질을 하느님인양 섬기고 있다. 그것이 악이요 죄이다. 맘몬이냐 하느님이냐의 문제는 육체냐 영혼이냐는 문제도 되고, 땅이냐 하늘이냐, 시간이냐 영원이냐 등의 문제로 발전해 갈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문제 앞에 봉착해 서게 된다. 그러나 육체는 결코 영혼에 앞설 수 없고 땅은 하늘 위에 있을 수 없으며, 시간은 영원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온통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인생을 낭비해가고 있다. 첫 번째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은 인간의 이 엄중한 사실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어리석음을 일깨워준다. 하느님의 말씀은 빵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물질이나 육체, 땅이나 시간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하느님과 영혼, 하늘과 영원 뒤에 종(從)으로 있으면 가장 쓸모 있는 것이 된다. 순서가 뒤바뀌면 사탄이 된다.
둘째 유혹은 야심과 지배욕이다. 권세와 영광에 대한 유혹은 물질에 대한 유혹보다 더 교묘하고 악랄하며 깊고 끈질기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당(심연)에서 울부짖는 짐승(야수)이라 했다(묵시 13,1-4참조). 특히 지성인들에게는 이 유혹은 물질적인 저속한 유혹보다 강렬하고 위험하다. 사탄은 아담에게서 빼앗은 권세를 예수께 보이면서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한다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요”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라 했다. 단 한번 머리를 숙이기만 하면 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은 예수님의 것이 된다.
얼마나 쉽고도 화려한 일인가! 그러나 주님은 단호히 거절하신다.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14). 그러나 권세도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권세를 남용하거나 자신의 영광이나 야심을 충족시키는데 사용할 때 사탄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된다. 항상 하느님 앞에서만 무릎을 꿇도록 하면 이런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음을 주님은 몸소 보여주신다.
세 번째 유혹은 허영(虛榮)과 교만에 대한 것이다. 기적을 자기 과시를 위해 남용할 때, 인간도 하느님의 원수가 된다. 그것이 곧 사탄의 제자이다. 남조다 출중해 보이겠다는 유혹, 유명해지고 싶다는 유혹, 존경받고 싶다는 유혹 등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으로부터 능력과 권세가 주어졌다는 사실까지도 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보다, 기적을 행하고 치유능력을 과시하며 영상을 보고 성혼을 받는 것들을 더 좋아하게 된다.
열심한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이 유혹을 이기는 길은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16)의 말씀을 명심하고 실천하는 것뿐이다. 기적이나 치유, 영상이나 성흔 등을 더 좋아하는 믿음은 곧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큰 잘못임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항상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제2독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에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행한다면 무엇 하나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이 이국땅에서 노예로 있을 때도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받지 않았던가! (제1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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