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납자 길을 따라가려면 먼저 쓰시마로 가야 하지만, 쓰시마로 가는 직항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부산에서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공항에 내리자 나가사키 교구 평협부회장 이시바시(石橋)님이 마중나와 있었다. 우리는 그의 헌신적인 안내로 나가사키, 오무라(大村) 운젠(雲仙) 하라쇼(原城) 구찌노쓰(口律) 요꼬세(橫瀨) 아리따(有田) 히라또(平戶)로 순례 답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피납자들이 간 길을 따라 거꾸로 쓰시마로부터 이야기 하려한다.
우리는 후쿠오카(福岡)에서 여객선 ‘뉴쓰시마호’를 타고 쓰시마로 떠났다. 배로 4시간 30분이 걸린다 한다. 나는 배 안에서 후쿠오카 여대생을 만났다. 그녀는 이끼(壹岐)까지 간다 하였다.“나는 서울에서 왔는데, 임란 때 피납된 한국인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길”이라며 “와진(王仁博士)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의아한 듯 눈이 뚱그래지며 “당신이 왕인이냐?”고 물었다. 내가 왕인가 아니라 일본에 한자를 전해준 사람이 왕인이라 하였더니 그제야 그녀는 “아, 와닌!”하며 국사에서 배웠다고 하였다. 내 발음이 좋지 않아 뜻밖에도 나는 왕인박사가 되고 배 안에는 한 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이끼의 아가씨는 미인이라던데?”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이끼의 아가씨는 피부가 희고 미인이 많다”며 약간 얼굴을 붉히었다. 그때 옆에 앉은 쓰시마에 사는 늙은이가 “이끼의 아가씨 보다 쓰시마의 아가씨가 더 아름답다”며 “쓰시마는 공기가 맑고 물이 좋아 미인이 많다”고 우기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배는 어느새 이끼(壹岐)항에 닿았다.
옛날 이끼는 히라또의 영주에 속해 있었다. 이끼는 옛날에는 ‘伊岐’ ‘一岐’ ‘由岐’ 등으로 표기하였고, 유끼(雪)의 섬이라고도 불리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감정이 착잡하였다. 이끼항은 ‘수은 가양록’(睡隱 看羊錄)으로 유명한 강 항(姜 沆)이 1597년 피납되어 쓰시마와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교토(京都)로 끌려 갈 때 잠시 머물던 쓰라린 곳이다. 강항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가 이 항구에서 한 섞인 피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은 그 한은 역사의 흐름에 씻겨가고 푸른 파도만 넘실대고 있었다.
이곳 이끼에는 천주교의 순교지도 있다.
히라또의 다이묘(大名=영주)였던 마쓰우라(松浦)는 천주교인을 잡아 멀리 외딴 섬으로 유형을 보내었다. 1619년에는 도미니꼬회의 모라레스 신부와 메나 신부가 체포되어 이 섬으로 유형되었다. 그들은 다시 오무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1622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하였다. 히라또에 살고 있던 아우구스 띠노 오따(太田)도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체포되어 이곳 감옥에 갇히었다. 그는 예수회의 수도사가 되어 죽는것이 소원이었다. 당시 예수회의 일본 관구장은 이 소식을 듣고 ‘보다 큰 용기와 기쁨을 가지고 하느님께 생명을 바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옥중에 있는 그의 소원을 들어 주어, 그는 이곳에서 큰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참수,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지는 이곳 공소에 상주하는 성 프란치스꼬회 야노 신부에 의하여 1965년에 확인, 보존되고 있다 한다.
오후 3시경 우리는 쓰시마의 이즈하라(嚴原)항구에 도착하였다. 나는 갑자기 ‘여기가 임란 때 우리 동포가 끌려가며 울부짖던 그 한 많은 이즈하라 항인가, 아니 일제 대징용으로, 군대로 끌려가며 눈물짓던 그 한 많은 항구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에서 내리자 커다란 안내판에 조선통신사 행렬도(朝鮮通信使行列圖)와 ‘아리랑축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이국땅에서 처음으로 우리 문화와 만난 기쁨이 앞서면서 “쓰시마는 우리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도 한국인을 많이 담고 있는 듯했다.
금석장여관에 여장을 푼 우리는 여관 주인에게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의 딸이며 쇼 요시도모(宗義智)의 아내인 고니시 마리아의 유적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고 하였다. 허탕을 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난감해졌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여관 가까이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항구에서 본 것과 같은 ‘조선통신사행렬도’와 ‘아리랑축제’의 원색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왜 이게 불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아리랑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그 때에 ‘조선통신사’의 가장 행렬도 장엄하게 열린다고 설명하였다. 그 집주인 기시하라(岸原)씨는 쓰시마 상공회의소 평의원이며 마산~쓰시마 간 여객선운항추진위원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고니시 마리아의 무덤이나 신사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신사가 있다고 하며 “이 섬사람이 아닌 고니시 마리아의 신사가 왜 이 쓰시마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 라고 하였다.
내가 그녀가 대마도주 쇼 요시도모의 아내이기 대문에 여기에 그 신사가 있는 것이라고 하자 그는 “아, 그렇습니까” 하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고장 향토사학자이며 ‘이조말 비운의 덕혜옹주(李朝未 悲運의 德惠翁主)’전기를 쓴 유끼다 요시로꾸(城田吉六)씨가 그에 관해 잘 안다며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기시하라씨의 봉고차를 타고 역대 대마도주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만송원신사(萬松院神社)로 갔다. 만송원은 쓰시마의 관광 명소로 울창한 숲속에 있었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니 관리인의 집이 있었다. 기시하라씨가 입장권을 사주어 막 문에 들어서려는데 유끼다씨가 전화연락을 받고 찾아 왔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