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의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신앙의 주제입니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 또 인격자가 되려는 박힌 사람이면 누구나가 원하는 희망사항일 것입니다.
마치 신앙인이 올바른 신앙을 통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완덕에 이르려는 원의와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인격자의 삶을 살아가는 데는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는 절대로 결론을 즉시 내리지 않고 화를 가라앉히고 나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후회가 적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격자입니다. 대개 화가 났을 때 죽인다, 살린다고 하고 내린 결론들은 얼마 안가서 스스로 후회하는 체험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는 완전이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라는 이야기를 제 자신은 이렇게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즉, 인간이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이웃으로부터 오해 한번 없이 모함당하지 않고 살아가겠느냐하고, 완전이 없는 세상 앞에 자신을 세워둡니다. 그러다가 누가 나를 모함할 때, 내가 남으로부터 비평을 받을 때 역시 불완전하구나 하고 화를 내기 보다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한 번 더 해주게 됩니다.
세상에 완전이 없고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소리를 듣고도,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 살아가면서 왜 남으로부터 오해받고, 모함을 당하면서 살아야 하지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다가 실지로 오해와 모함을 당하면 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은 당연한 현실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여유를 갖게 해준다는 현실적인 은총을 우리는 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데 신앙을 갖는다는 사실은,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그 신상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나벤뚜라 성인은 신앙의 발전과정을 3단계로 크게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첫 입문으로서 교회는 이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왕 믿는다면 그 믿음이 더 깊어지고 커져야 한다고 교회는 권고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신앙이라면 그 신앙은 꽤나 튼튼하고 깊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인들에게 이왕 믿는 믿음이 더욱 완전에 도달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완전한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성인은 말했습니다.
확실히 신앙은, 우리의 마음의 자세를 바꿔 놓습니다. 사랑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신뢰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먼저 신앙의 기초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웃이 잘하는 것을 보면서도 시기하고 질투를 하며, 이웃의 잘못은 더 말할 필요 없이 비평하고 욕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는 그들의 잘못에 대해, 그래도 저 사람은 저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지만 나는 어쩌면 더 큰 잘못을 범하지 않나 하고, 이웃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웃의 선행을 보고는 물론 기뻐합니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긍정적으로 살게 해 줍니다.
자기는 신앙이 깊다고 착각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죄를 짓고 난 후, ‘아! 이제 내가 나를 보아도 밉고, 아! 어쩌다가 내가 이런 죄를 지었지? 아! 이제 성당에 나가기도 부끄럽고, 아! 신부님 보기도 미안하고…’ 이렇게 아! 아! 하고 심하게 하면 아! 하면서 가래침이 튀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이 아니고 자기 감상이며, 더 심하면 염세적으로 변해버립니다.
정말 신앙인은 어쩌다가 죄를 지으면 깊은 통회를 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고해성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어제의 죄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으니, 오늘은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일 좋아 하시는 것이 사랑이니까, 오늘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이웃을 한번이라도 더 이해해주고 한번이라도 더 용서해 주려는 진짜 신앙의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어차피 세례받기 전에도 죄를 지었고 세례 받고 난후에도 죄를 지었고, 죽을 때까지 죄를 짓다가 죽어갈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데도 신앙을 갖는 이유가 있다면, 살아있는 동안 한번이라도 죄를 더 짓지 않으려고 신앙 안에서 노력하는데,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그 삶이 어떤 형태의 삶이든 고통과 희망이 없는 인간의 삶은 없습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고통은 은총의 전주곡이다’라는 여러 형태의 말들은 신앙은 고통을 승화시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옛 말에도 ‘젊어서 한 고생은 나중에 돈 주고 못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인간적인 때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상처만을 우리마음에 남깁니다. 그러나 고통은 신앙 안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격완성과 하느님의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우리 성조 치명자 성인들이 그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웃으면서 죽어 갈수 있었던 힘은 바로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이 끝나가고 주리를 트는데도 웃을 수 있는 것을 정신신경과에 가서 진단하고 분석할 때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돌았다’는 진단뿐일 것입니다.
이만큼 신앙의 힘은 이세상의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초월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신앙의 뿌리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치고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하는 신앙 안에서만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가 좋아서 한 것 보다 싫은 것이라도, 어려운 것이라도,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게 해주는 힘이 바로 신앙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아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이 말의 뜻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참된 사랑의 삶을 살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결코 인간으로 하여금 딱딱하고 경직된 삶이 아닌, 인간미를 갖게 합니다. 이 인간미는 슬퍼하는 이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이와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삶의 모습을 갖게 합니다. 몇 백 년을 사는 삶이 아닌 이해해주고 용서하며 나누는 삶은 우리 모두에게 확실히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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