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순의 유끼다씨는 신사를 향해 모자를 벗고 경건하게 절을 하였다. 나는 거기서 신사를 숭배하는 일본 민족성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했다. 사실 나는 임란 때 우리를 침략한 대마도주 쇼 요시도모(宗義智)의 신사를 찾아 온 것이다. 거기를 왜 갔느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피납자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없으니, 그들을 잡아온 침략자의 발자취라는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사 앞뜰을 돌아 1백여 개의 화강석 부도탑 양식의 묘비들이 나왔다. 웅장하고 화려한 여러 무덤들 중 쇼 요시도모의 무덤은 너무 초라하였다.
쇼 요시도모와 고니시 마리아가 결혼하게 된 것은 고니시 유끼나가가 조선정벌을 위한 군사적 기지를 쓰시마에 마련하기 위한 정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세례를 받겠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한 쇼 요시도모는 1591년 영세하였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가 웅천에 와서 쇼 요시도모를 만났을 때, 그는 마리아를 통해 선물로 보낸 커다란 묵주를 목에 걸고 있었다 한다. 그 후 쓰시마에는 신자가 많아, 1600년에는 마리아의 청에 의하여 나가사키로부터 신부 1명과 수도자 1명이 파견되어 3백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었다. 그러나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고니시 유끼나가가 세끼게하라(關方原)의 싸움에서 패하자, 그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한 쇼 요시도모는 자기의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마리아와 이혼을 선언하고 배교를 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쓰시마에는 천주교 신자가 없다 한다. 아내와 이혼을 하고 또 배교를 하면서까지 살아남으려던 쇼 요시도모의 무덤이 이렇게 초라한 돌덩이에 지나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새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고니시 유끼나가는 우리의 원수이긴 하지만, 그의 순교는 장렬한 것이었다. 세끼게하라의 싸움에서 패한 그가 사형 집행장으로 떠날 무렵, 절에서 큰스님이 와서 그들을 위해 독경을 하였었다. 다른 다이묘들은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였으나, 그는 “나는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천주 이외에 다른 것은 모른다”하며 독경을 정중하게 사절하였다. 그는 신부님의 종부성사를 받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 최후의 소망이 거절되자, 그는 현장으로 끌려가면서 스페인 국왕 가톨로 5세의 누이 가타리나가 보내준 십자가와 성상을 손에 꼬옥 쥐고 기도를 드리었다. 형장에 도착하여 마지막으로 하늘을 우러러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조용히 목을 내밀어 세 번 내리치는 칼날아래 목이 떨어져 죽음을 맞이했다.
쇼 요시도모의 초라한 무덤 앞에서 나는 잠시 인생의 기구한 운명들을 묵상하다가 발길을 돌려 계단을 내려왔다.
유끼다씨가 덕혜옹주의 결혼 기념비가 이곳에 있다고 하였다. 입구 담장구석에 쓰러진 채로 버려져 있었다. 한말의 비운의 역사가 땅속으로 묻혀가는 느낌이 들었었다.
우리는 만송원을 나와 고시니 마리아의 신위가 모셔진 하찌반궁(八幡宮)신사로 갔다. 하찌반궁신자 경내에는 신사가 셋 있었다. 정문에서 보아 맨 왼쪽에 있는 것이 고니시 마리아의 신사라 하였다. 유끼다씨의 설명에 의하면 이 신사에는 안독 꾸덴노(安德天皇)와 고니시 마리아와 그 아들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한다. 그러나 그 안내판에는 마리아와 그 아들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유끼다씨에게 그 이름을 빼버리고 쓰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무 이유도 없다”고 하였으나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혹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빼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곳 쓰시마와 또 마리아와 관계가 깊은 조선인 피납자는 일본 205복자 중의 한분인 權(姜?)빈첸시오와 가이요이다. 빈첸시오는 일본이름으로는 가피이오에(嘉兵衛)라 한다. 고니시 유끼나가는 전쟁터에서 헤매는 고아 두 소년을 그의 딸 마리아에게 보내었다. 그녀는 그들을 잘 보호하고 있다가 그 중에 나이가 많은 13세 된 빈첸시오를 곰개에 왔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부탁하여 신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는 비록 한국에 천주교가 들어오기 이전이긴 하지만,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신학생이 된 것이다. 그는 예수회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전도사가 되어 재일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지도자로서 교포활동에 열중하였다. 1612년 예수회에서는 조선 선교를 위해 그를 파견키로 하였다.
그는 해로로 입국하려 시도하였으나 전쟁으로 경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거기 4년간 머무르며 입국의 기회를 노렸으나 당시는 명청 교체기여서 국경의 감시가 삼엄하여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20년 일본으로 돌아가 조라 신부와 함께 시마바라(島原)에서 포교하다가 1625년 체포되어 나가사키 니시사까(西坂) 공원에서 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참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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