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요즈음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하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과학과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더 정직해지고 또 신뢰심이 더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로 더 각박하고 인색하고 사람들이 더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악과 부정과 불의와 가짜가 선보다 진실함보다 진짜행세를 하고 있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현대인들은 인내할 줄 모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숙방 청소 때문에 친구를 죽이고, 국민학고 동창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말을 한다고 야구 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고, 아버지가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집에 불을 지르고…. 이런 현상이 사회 전체는 아니지만 정말 우리 사회는 어딘지 모르게 병들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옛날, 그것도 불과 30~4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는 찌들게 못사는 사회였습니다. 춘3월에는 보릿고개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비록 어렵게 살았지만 그때는 선과 악의 구분을 인간 양심에 기준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혹은 ‘양심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런 우리 사회가 잘 먹고 잘 입게 되어 그런지는 몰라도 얼마 전 5공 때만 해도 ‘양심’을 이야기하면 “얘, 얘, 양심이 밥먹여 주니?”하고 그건 쾌쾌 묵은 사상이나 옛날이야기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래서 5공 때의 선악의 기준은 벌을 어겼느냐 어기지 않았느냐에 따라 감사패를 받거나 감옥에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요즈음에 와서는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실정법이든 무엇이든 법을 어겨도 목소리만 크면 이기고 다 먹혀들어가는 세태입니다. 파괴하고 불지르고 해도 책임소재는 불분명하고 언제나 약하고 빽 없는 사람만이 억울할 뿐입니다. 악이란 꼭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악이 아닙니다. 여럿이 공존하는 사회나 공동체에 질서를 파괴하는 무질서도 악입니다. 이런 판국에 이웃을 신뢰해라, 이웃을 사랑해라, 그리고 복음이 가르치는 ‘남이 그래도 나보다는 낫다고 인정 해주고 이웃 형제가 나보다 하느님 은총을 더 받는다고 생각해주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인간의 눈으로, 사고방식으로 볼 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이고, 바보같은 이야기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웃을 신뢰하지 않을 때 자기의 마음을 열수 없습니다. 믿는 친구에게 마음을 열고 마음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우정이나 사랑은 신뢰가 없이는 결코 생길 순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뢰는 사랑을 낳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신앙인들에게 ‘믿음’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올바른 신앙이 없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지 못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노예가 되어가는 우리들에게 ‘인간성’ 회복은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인간답게 살자는데 있습니다. 그 인간성 회복에서 믿음 즉 서로의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가끔 내가 내 자신을 얼마나 신뢰하느냐고 자문해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신뢰하지 않고서는 남을, 더구나 하느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이웃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틀림없이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올바르게 신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신뢰성을 하느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 자신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욕심과 욕망 때문입니다. 사순 제3주의 복음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쫓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성전의 정화, 마음의 정화는 욕심이나 욕망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욕심은 불신의 씨앗입니다. 욕심은 악의 뿌리입니다. 욕심은 자기만을 생각하고 남을 인정해 주지 않고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욕심은 남을 무시하고 남의 것을 강탈하고 남을 질식시키고 죽입니다. 소유하려는 욕망, 성적인 욕망, 지배하려는 욕망을 복음적인 권고에서는 바로 청빈, 정결, 순명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인간의 인격적 완성과 신앙인의 완덕에 그 기준을 삼고 있습니다. 욕심의 특성은 사랑을 저버리고 자유를 파괴하는데 있습니다. 욕심은 법을 무시하고, 진리를 우습게 여기고,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욕심과 욕망은 언젠가는 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는 진리를 우리는 인간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우리 사회의 병폐는 인간 욕심이 팽배해 지는데 있다고 봅니다. 옛날 자유당 시절에는 남의 코를 베어가는 사람이 그래도 양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를 베기 전에 상대편을 보고 눈을 좀 감아 달라 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감으면 코를 싹둑 베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고, 완전히 상황이 뒤바뀌었습니다. 코를 베는 사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코를 베이는 사람으로 그는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코를 베려는 사람에게 눈을 감을까요 하고 묻습니다. 이때 코를 베는 사람은 그냥 눈뜨고 있어도 좋다고 대답하면서 남의 코를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한갓 비유의 표현입니다만 이만큼 양심의 소재도 불분명하고 각박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돈’이 개입되면 핏줄이 끊어져버리고 20~30년 친구간의 우정도 ‘돈’ 때문에 우정이 끝나 버리는 것을 보면 물질 가운데서도 과연 ‘돈’의 위력의 대단함을 봅니다. 사람이 세상의 주인 자리에서 밀려나고 돈이 세상에서 주인의 행세를 하는 서글픈 세상입니다. 여기에서 신뢰와 우정과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우리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길 뿐입니다. 우리네 속담에 ‘마음씨를 곱게 써야 복을 받는다’는 말은 오늘의 사회에 부르짖는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일까요? 비록 좀 어렵게 살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믿고 사는 사회는 분명히 기쁨과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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