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지금 사순3주째를 맞는다. 특히 오늘은 성전이 얼마나 거룩한 곳이며 참으로 만인의 구원을 위한 곳인가를 깊이 생각게 해준다. “당신 (하느님 아버지)의 집을 향한(아끼는)내 열정이 나를 불사르옵니다”(시편 69,9) 진정주님은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거룩한 곳이며, 만민이 함께 축복받고 구원받는 곳이며 위로와 용기를 얻는 곳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다. 그런데 그 신성함과 구원의 기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둡고 차가운 형태만의 것이 되었으며, 그나마도 사이비종교 지도자들의 간교한 횡포와 재산을 긁어모으는 도적의 소굴로 변한 것을 보셨을 때의 분노는 차라리 예수님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고통보다도 더 컸을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을 접할 때마다 가슴에 불붙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그리고 흔히 화를 내고는 “예수님도 화를 내셨는데”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진정한 분노의 뜻을 모르는 자들의 그 말이 다시 한번 주님을 모독하고 더욱이 ‘성전정화’의 불타는 정열을 욕되게 하고 있음을 개탄치 않을 수 없다. 진정한 분노는 사랑에서 온다. 전체적인 의미에서는 ‘분노’는 사랑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겨우 일부분만으로 최소한도의 삶을 살기에 분노마저도 이기주의적인 자기감정의 처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 어찌 사랑인들 제대로 할 수 있으며 더군다나 주님의 이 ‘자신을 불사르는 분노’의 뜻을 감히 상상으로라도 알기나 하겠는가? 진정한 사랑은 목숨을 내주고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 즉 그 자신 전체로 사랑하는데 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 아니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 인류를 위해 당신의 고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남기지 않고 아낌 없이 쏟으셨다. 부모는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기에 자녀들의 실패는 곧 자신의 실패이기에 분노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그런데 요즈음 부모는 모두 자신들의 이기심으로 해서 자녀들을 들볶고 있기에 분노할 자격조차 없는 자들이 많다) 예수님은 바로 저들(타락한 종교지도자들과 장사치들)을 위해서도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실 각오가 있으셨기에 내놓으실 각오가 있으셨기에, 아버지 집의 모독은 곧 인류 자체의 모독이요, 저들의 멸망이기에 그토록 화를 내실 수 있으셨다. 함부로 성경을 자신의 이기적인 작태(감정적 분노)의 변명의 도구로 삼지 말라. 주님의 분노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증명하셨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신 주님의 의분(義憤)을 더없는 사랑의 교훈으로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께서도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이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였다”(오늘 제2독서)고 한탄하고는 “그 (예수)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라고 선언하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고 단정한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진정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1코린 2,5)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현실에 대해 반성해 보자. 과연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열성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성부와 성자, 성령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지정으로 분노할 수 있는 열성은, 곧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랑에서만 나온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사랑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벗(이웃)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오늘의 제1독서는 탈출기의 십계명에 대해 전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과 사랑의 차이에 대해 전해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과 사랑의 차이에 대해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완성하려 오셨다
따라서 율법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 즉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 역할을 할뿐이며(갈라 3,24 참조)또한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오직 불의 한자와 복종치 않는 자, 경건치 않는 자와 하느님을 떠난 죄인, 신성을 모독하는 자와 거룩한 것을 속되게 하는 자, 부모를 치는 자와 살인자, 음탕한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 거짓말을 하는 자 들을 다스리기 위한 것(티모 1,9-10참조)일 뿐이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못 받는다(로마 3,20참조).
사랑 속에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율법이 있고, 구원이 있으며, 기쁨과 평화가 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동시에 이웃과의 일치를 이루는 동시에 이웃과의 일치를 이룬다. 세상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평화를 얻고, 구원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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