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10년 전 2월 16일,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그가 적은 시 ‘나의 기도’의 소망처럼 ‘당신’을 만나기 위해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자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돼 준 김 추기경. 서슬 퍼런 독재 시절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고통 속에 힘들어 하는 많은 이들이 김 추기경을 그리워하고 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하느님 곁으로 떠난 그의 선종 1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김수환 추기경 연보
1922. 5. 8.(음력) 대구 남산동에서 출생
1951. 9. 15. 대구 계산동주교좌성당에서 사제 수품
1956. 7. 16. 독일 유학, 뮌스터 대학 대학원 신학·사회학 전공
1964. 6. 1.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 임명
1966. 2. 15. 초대 마산교구장 임명
1968. 4. 9. 서울대교구장 임명, 대주교 승품
1968. 5. 29.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식
1969. 4. 30. 추기경 서임식
1980. 5. 23.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서한 발표
1982. 3. 31. 전두환 대통령과 면담.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 고문 금지와 법률적 지원 보장 요청
1987. 1. 26. 박종철 군 추모 미사
1994. 4. 24.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최초의 미사
2009. 2. 16. 선종
■ 사람을 사랑한 ‘거룩한 바보’
김수환 추기경이 가진 유일한 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인간)이 모두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행동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힘써 온 그는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의 추모시 ‘거룩한 바보’의 내용처럼,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가장 소외된 이들을 서슴없이 찾아 나섰다. 가난한 이들은 물론 한센병환자들, 성매매 여성들, 상계동 철거민 등 우리 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 곁에 항상 머무르며 그들의 다정한 친구가 됐다.
또 탄광 노동자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겠다고 강원도 사북까지 찾아가기도 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형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미사를 주례했다. 1987년 4월에는 상계동 판자촌에서 강제철거당한 주민들이 주교좌명동대성당 들머리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자,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그는 2주 만에 교구장 자문기구로 ‘도시빈민사목위원회’(현 빈민사목위원회)를 설립했다.
오늘날 서울대교구 사회복지사목, 노동사목, 빈민사목의 틀은 대부분 김 추기경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 사회복지 활동에 대한 사회적인 높은 인지도는 대부분 그에 의해 다져진 셈이다.
사랑에 관한 김 추기경의 철학은 그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놓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온갖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눠야 한다는 의미로 이 성구를 골랐다.
아울러 김 추기경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던 한국사회를 밝혀온 ‘별’이었다. 유신 이후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도 그는 ‘인간 존엄’을 실현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는 모든 논리의 처음과 끝을 모두 ‘사람’에 두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한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이념에 좌우되지 않고 원칙을 지켜나갔다.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때로는 ‘용기 있는 발언’으로, 때로는 ‘중용의 침묵’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 왔다. 진보도 보수도 아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온 것이다. 권력자들에게는 양심의 소리를 일깨우는 시대의 예언자였으며,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그가 머물던 명동성당은 핍박받는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이자 민주화의 성지였다.
1987년 고(故) 박종철 추모미사에서 그는 권력자들을 향해 “이 정권의 뿌리에는 과연 양심과 도덕이 있는지, 아니면 이 정권의 뿌리에는 총칼이 있을 뿐인지”라고 지적하며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고 호소했다. 또 1987년 6월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학생들을 정부 관계자들이 체포하러 오자 “나를 밟고 가라”며 엄준히 꾸짖어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 기도하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
김수환 추기경의 곁을 지켜온 많은 이들은 그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성경 구절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처럼 그는 선종하기 전까지 기도로써 하느님을 온전히 따랐으며 달릴 길을 훌륭하게 완주했다. 완전한 ‘하느님 바라기’로 살며 그 사랑을 베풀고 내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기도는 기다림이었다. 바라는 것을 주실 때도 있고 주지 않으실 때도 있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을 믿고 따르는 것이 바로 기도였다. 기도를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하루 한 시간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교회에 나오라”거나 “기도하라”고 직접적으로 권유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후배 사제들에게 “기도할 때는 마음이 아침 이슬 머금은 풀잎 같지만 하지 않을 때의 마음은 가뭄의 논바닥 같다”며 “주님 앞에 나와서 머무르라”는 가르침을 주는 정도였다.
김 추기경의 기도는 훗날 그가 사회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는 데 큰 힘이 돼 줬다. 또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공부한 사회학은 그가 사회참여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은사인 요셉 회프너 추기경의 ‘그리스도교 사회학’이 그리스도교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유학생활을 마친 뒤에는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으로 부임하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 먼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공의회 관련 외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훗날 그의 신학과 영성의 기반이 됐으며, 추기경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2년간 사장으로 재직하며 그는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의 사설을 지면에 자주 실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미사에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허물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회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사회의 빛이 돼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아가 교회가 공동선에 기여하려면 사회의 불의와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회 속의 교회’를 강조하며 교회의 예언직을 수행해 온 김 추기경. 그는 세속의 권력이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에 대해서는 잘못됐다는 것을 용기 있게 밝히며 교회가 시대에 맞는 예언직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1986년 서울 상계동 철거민들과 함께한 성탄 미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01년 사형수를 안아주고 있는 김 추기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2007년 서울 동성고 100주년 전시회에서 김 추기경이 자화상을 보며 웃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