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을 맞으면 언제부터인가 부모님을 자주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린 시절 자식에게 쏟던 부모님의 그 많은 관심들이 왜 그리 잔소리처럼 들렸던지 모르겠다. 철이 덜 들어 그랬었다고 자위해 버리면 그만일까?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가자고 하면 가기 싫었다. 꼭 청개구리 같이 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근자에 이르러서는 부모님에 대한 그때 그 모습들을 기억해 보면서 한없는 감사의 정이 생겨난다. 철이 조금 들었다고 자위해도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부모님께서는 자식을 사랑하고 계셨다는 점, 그리고 자식은 그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된 모양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지, 그 깨달음이 은총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부모님을 ‘사랑하게’되고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다”(요한 3,16) 라는 표현으로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의미의 핵심을 알려주셨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니고데모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예수님의 말씀 중에 담겨져 있는 진실을 진정 이해할 수 있었을까?
물론 당시 바리사이파에 속했던 사람들로서는 이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고 보인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리사이파들이란 율법의 지도자이다. 율법은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성스러우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무리로 분류해 버리는 거만한 의식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들도 바리사인파들처럼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이란 암흑의 주인공, 예수님의 원수가 지배하는 세상 곧 하느님의 모든 것에 대립하는 세상을 말한다. 예수께서 단죄하시고 이겨내신 이 세상에서 우리 스스로는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이 존재하는 한 예수의 십자가도 구원의 길로써 존재한다.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우리 자신들의 노력을 요구함은 사실이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기심은 떨쳐버리고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도 또 하나의 복음의 핵이요 정점이다.
복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은총을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신다는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이끌어 올려 주시려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신 ‘순수한 사랑의 삶’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사랑받고 있다’는 실제적 감각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생명력이 흘러나온다.
순수한 사랑의 삶을
우리들의 일상적인 체험을 생각해 보자.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사랑의 은총을 받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불안해 진다. 신경질적이 되기도 하고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자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즐겁고, 의욕이 생기고, 사랑의 보답을 하고 싶어 한다.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기쁨과 힘에 근거한다. 사랑받고 있다는 자각은 우리 삶의 바탕이 되고 그 바탕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명력을 얻는다. 연약한 우리들로서 ‘사랑하는’것이 가능한 것은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항상 전제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이 진리를 분명히 해주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명해 주셨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해 주셨음을 제시하신다.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이 사실에 은총의 근원이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평화와 희망이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무수한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것과 대적해서 싸울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나온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외친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정입니까? 박해입니까? 헐벗음 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로마 8,35)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도들, 성인 성녀들, 오늘의 참 신앙인들의 훌륭한 교회활동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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