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도 5주째로 접어든다. 우리가 사순절을 깊은 자성(自省)의 시기로 삼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점차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탈바꿈하기 위함이다. 첫째로 우리 믿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이제까지 이 세상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환희였다. 다음은 그러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써 이웃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이며, 또한 나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이었다. 관용과 아량, 이해와 동정, 화해와 일치 등,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꽃을 피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었다. 하느님께서 돌보시지 않으시면 인간은 한 순간도 살아 있을 수 없는 처지이다. 이제까지 자기가 잘나서, 자기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 무한하신 은총의 선물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자신을 비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자기 자신을 비울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야 하다는 것을 깨닫고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오늘의 복음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의 목숨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람뿐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떠한 생명도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특히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것’(창 1,26)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다. 이렇듯 고귀한 생명을 부여받은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의(怒意)대로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성 모독이 될 것이다.
참고로 성서에 나오는 목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신약성서에서는 이 목숨, 생명 이라는 단어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첫째는 ‘비오소(Bios)’라 하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방식 즉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경건하고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뜻의 삶이요, 또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 세상 걱정과 재물과 현세의 쾌락에 눌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루카 18,14) 현세적 생명이요, 혹은 생활비 즉 과부의 헌금에 언급하시면서 “이 과부는 구차하게 살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쳤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마르 12,44)는 듯의 생명이다.
그 다음은 ‘프쉬케’라는 단어로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그대로의 생명이다(목숨이라고 번역됨). 안식일에 사람을 살렸다고 생트집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신 그 목숨을 말한다. (루카 6,9 : 마태 16,25:요한 12,25: 사도 20,10 등 참조). 세 번째가 ‘조에’로서 하느님의 본질에서 나온 생명,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것으로서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한 1,4)이라는 생명이요.
“그를 믿는 사람은 누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16)는 생명이다.(요한 5,24.26 I요한 5,11. 12참조)
즉 둘째 번 ‘프쉬케’적 목숨을 버렸을 때만이 ‘조에’적 생명을 살수 있다는 것을 오늘의 복음은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석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그 한 알이 죽어서 분해되면 거기에서 새싹이 나와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이는 천지의 이치이며 하늘의 법칙이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이 이 법칙과 이치에서 어긋나는 짓만 해오고 있다.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들어가면 그것은 위대한 성취이지 결코 소멸이 아니다. 일단 이기적(ego)인 목숨의 껍질을 벗고 넓고 넓은 하느님의 품에 안긴다면 인간의 신적 생명으로 더 할 수 없는 풍요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양들(인간들)이 생명을 얻고 그들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다”(요한 10,10). 새로운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낡은 건물은 파기(破棄)돼야 한다. 낡은 집만을 고집할 때, 영원히 새롭고 풍요로운 집은 세워질 수 없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면담하기를 요청한다. 그러나 때는 임박했다. 사사로운 말을 나눌 틈이 없다. 주님은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말씀을 들려준다. 그것이 오늘의 말씀이다. “목숨을 아끼는 자 잃고,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이 역설적인 말씀의 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하느님께서 그를 높이신다”
주님은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당신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승리로 대단원을 이룰 구원사업을 생각하신다. 잠시 동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 드신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왔음을 보신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온갖 수단과 방법들이 평가받을 때이다. 이 세상의 통치자 (사탄)가 쫓겨나고 하느님의 나라, 주님이 다스리는 사랑과 평화, 기쁨과 일치의 나라가 올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사순절 동안, 진정 우리의 낡은 생활방식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며 섬기는 새 생활로 탈바꿈해야 하겠다. 그리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는 그 복종에 대해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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