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예수께 대하여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를 따라 다니던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여 말한 것이었고 이 고백으로 다른 제자들의 신앙심도 한층 더 굳건하게 되었다. ‘살아계신’ 그리고 ‘하느님’, 그리고 ‘그 아들’, ‘그리스도’, 즉 ‘메시아’ 이러한 신앙고백의 요소들은 믿어서 손해 볼 것 없는 적극적이 내용들이다.
그러나 메시아가 나타나서 걸어가야 할 길은 고통의 가시발길이며 죽음의 고통을 겪은 후에야 그 사명이 완수되어 영광으로 나타날 하느님의 인류구원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어 의심치 않는 베드로와 동료 제자들도 아직은 이 비밀을 알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앞으로 차근차근 점차적으로 실제 체험을 통하여 성령의 빛을 받아 이 묘리를 터득하게 되겠지만 군중은 기다리는 메시아를 승리의 장군, 외적에 군림하는 이스라엘 왕국의 왕자로 기대하고 있었던 만큼 하느님의 계획을 완수하려는 예수의 메시아 사명을 민중에게 알리기에는 아직도 시기상조였다. 정치적인 메시아관을 영성적인 메시아관으로 바꾸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셨다. 이것은 아직은 친근한 제자들만이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이었다. 예수께서 등장하여 하느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가르치시고 온갖 종류의 병자들이 치유를 받고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할 때만 해도 이 메시아의 고통의 길은 제시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베드로의 메시아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은 후부터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이다.
자신을 늘 사람의 아들이라 불러온 예수께서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고 그들 손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날 것이라는 예고를 하셨다. 여기서 ‘반드시’라고 번역한 것은 ‘꼭’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의 아들이 겪을 고난을 예언한 예언서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메시아로서의 예수가 앞으로 갈 길은 수난에 이르는 예루살렘길이다. 이 말씀을 하시는 지점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먼 이스라엘땅 끝지점이며 여기서부터 수난에 대한 교훈이 시작된다. 이 길은 세례자 요한이 죽음으로써 예수를 위하여 준비한 길이기도 하다. 사람의 아들은 결국 승리의 영광을 받겠지만 그 영광의 길은 수모와 천대를 거쳐서 달성된다. 이것이 구약성서에 예언된 사상이다.
민중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지혜서에는 고난을 당하는 의인이 운명이 예시되어 있고 (2,12-20: 5,1-17), 이사야서에는 영광을 떨치며 심판하러 올 사람의 아들모습을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형상으로 제시하고 있다.(52,13-53,12). 사람들의 멸시와 수모 그리고 조롱을 받는 사람의 아들상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인 메시아상은 베드로와 그 동료 제자들도 융합시키기가 어려웠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는 역시 하느님의 아들이어야지 사람들의 멸시와 배척을 받고 사형을 당하는 치욕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천대받고 배척받음이 없이는 세상구원의 대사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언급된 것은 시편118편22절 ‘집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예언을 시사하는 것인데(마태 21,42) 예루살렘의 최고지도자들, 교권을 잡고 있는 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사람의 아들을 배척하겠지만 배척받은 사람의 아들이 교회의 머릿돌이 되리라는 구원사업의 묘리를 가르치는 대목이다. 이 수난예고에 부활의 승리를 덧붙였지만 제자들은 그 말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치욕의 죽음을 당하리라는 말에만 충격을 받는다.
베드로가 또 나서서 스승의 수난이 부당함을 강조한다. 그는 예수를 붙들고 따라 물러나 예수를 꾸짖듯이 말했다.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의 꾸짖음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꾸짖음이었다. 이 말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영성적인 꾸짖음으로 답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걸려넘어지게 하는 돌을 던지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
여기서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은 일찍이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재계를 지키면서 마귀의 유혹을 받을 때 한 말이다. 마귀는 예수의 하느님일 착수를 방해하기 위하여 세속의 영화를 제시하며 인간적인 허영심과 자존심을 부풀게 하며 유혹하였다. 그래서 그 유혹자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오늘 베드로는 하느님의 일에 대한 무지 때문에 예정된 예수의 고난길을 가로 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사탄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란 뜻이다. 물러가라는 말은 꺼져 없어지라는 뜻이 아니고 내 앞길을 가로 막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는 뜻이며 베드로에게는 뒤로 물러나서 따라 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참 제자의 자격을 얻고 그 길을 걸으려는 베드로가 예수의 뜻을 따를 수 있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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