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주님의 때가 왔다. 교회는 사순절의 절정을 이루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당신의 구속사업을 완수하시는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함께 어울려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신앙인으로서의 새로운 각오를 굳게 해준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어울려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신앙인으로서의 새로운 각오를 굳게 해준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지지 않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죽음(이기심의 죽음)을 확인해야한다. 우리의 믿음이 이기적인 것이었다면, 오늘 이 사순절 마지막주일에 완전히 그 뿌리를 뽑아버리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오늘의 복음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면을 부각시켜 그 대조를 이루게 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의 참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신다. 즉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구세사업)의 양면일 뿐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안이한 믿음 속에서 주님의 천주성만을 믿어왔다. 사실은 주님은 항상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표현하시면서 인간적인 면을 그렇게도 많이 보이셨다. 그것은 연약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제2독서에서 사도바울은 이에 대해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당신의 메시아성을 구약성서에 예언된 그대로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새끼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러자 ‘수많은 군중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았다’ 올리브 나무 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기도 하고 손에 손에 흔들면서, 진정 메시아가 오셨음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실로 감격적이며 열광적이면서도 장엄하고 거룩한 장면이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뿐, 모욕과 편태, 심문과 조롱 그리고 급기야는 십자가에 처형되는 상호모순된 상황이 어떤 드라마도 흉내낼 수없는 극적인 장면들이 벌어진다.
군중들의 열광을 목도한 바리사이인들은 이를 갈면서 주님께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치를 떨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제자들이 날로 늘어나고, 주님의 영광이 드높아질 때마다 이세상의 권력자들(악마들)은 그렇게도 기성을 떤다. 여기에 걸려 넘어가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당신이 열광적인 환영을 받을 때에도 겸손과 신중성을 잃지 않으셨고,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결코 변질되거나 비굴하거나 인내성 없는 그러한 행위는 추호도 없으셨다. 지금 우리들은 사탄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박해란 총칼에 의한 그것만이 아니라 금전·권력·미색 등 교묘한 수단으로 악마는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열심한 신자들을 타락시킨다. 그것은 현대적 박해의 위장된 일면이다. 주님과 함께 그러한 모든 박해의 유혹을 의연하게 물리치고, 십자가지고, 부활의 영광을 향해,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굳건히 걷기 위해 오늘의 복음은 살아있다.
원수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정견(定見)없는 군중들을 설득 반, 협박 반해서 어제의 열광을 오늘의 증오로 바꾸어 놓았다. 주님은 동족(유대족의 대제관과 유대왕)의 법정에서 모욕적인 심문을 받고 다시 이교도(로마 군인)의 법정에서 빌라도로부터 조소적(潮笑的)인 심문을 받는다. 그리고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자, 정치적인 흥정꺼리로, 다시 헤로데에게 보내진다. 비겁하고 야비하면서도 소심한 헤로데는, 자신의 책임을 군중들에게 돌린다.
예수님은 그러한 과정에서도 한마디 변명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우리도 그 침묵의 의미를 깊이 터득해야 한다. 주님의 교회도 많은 모략과 협박을 당하고 악질적인 중상을 당할 때가 있어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낮은 의식수준의 속된자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이해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생활해가는 도중에서 참으로 억울한 일들, 모략중상을 입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의 침묵을 배워야 한다.
드디어 주님께 억울한 ‘십자가의 형’이 언도되고, 주님은 역시 묵묵히 침묵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다. 어떠한 억울함도, 어떠한 비리도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참으면 만사가 순리대로 돼간다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구차한 변명이나 해명 따위는 물론이요, 어떤 진리를 말하더라도 들을 귀 없는 자들에게는, 사건과 일만 복잡해줄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곧 닫혔던 하늘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이제 인류에게는 다시 하늘로 향하는 통로가 트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앙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질 때만이 진정한 것이 된다.
그때 우리에게도 하늘의 문이 열린다.
오늘의 장엄한 전례(典禮)는 이러한 것들을 상징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없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우리 모두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도록 함으로써 영광의 부활절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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