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바라(島原)반도에 있는 운젠 순교지를 순례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시바시님의 차를 타고 아침 일찍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정오쯤 오바마(小浜)에 도착하였다. 운젠도 행정구역상으로는 나가사끼현 오바마 마찌(町)에 속한다. 운젠과 오바마는 온천지대로도 유명하지만 순교지로서도 유명하다. 오바마에서는 1914년 영주 아리마 나호스미(有馬直純)가 배교하고 천주교를 박해하자, 4명의 무사가 동굴에 숨어살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운젠은 시마바라 반도 중앙에 자리잡은 해발 2천5백 피트의 고지로, 산상에 오르면 열탕(熱湯)이 분출한다. 옛날에는 이런 분화구가 3~4개 있었다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줄어들고 또 장소도 옮겨졌다 한다. 이곳은 분화구에서 치솟는 수증기와 돌멩이와 끓는 물소리와 독한 유황 냄새 때문에 예로부터 ‘지옥의 유황천’ 또는 ‘운젠옥’이라고 불리었다.
이 지옥의 유황천으로 천주교인을 끌고 가 고문을 시작한 것은 시마바라 영주 마쓰구라 시게마사(松倉重政)때부터다. 그는 1627년 바오로 우에몬 등 16명을 이곳으로 끌고 와 옷을 벗기고 새끼줄로 목을 묶어서 열탕 속에 처넣어 죽였다. 이 속에는 어린 아이도 여자도 있었다. 그해 5월 17일에는 또 10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628년부터는 방법이 바뀌었다. 천주교인들을 죽이는 것보다는 배교케 하는 것이었다. 1629년 나가사키의 새 부교(奉行)로 다께나가 우네메노쇼 시게쓰구(竹中采女重次)가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 벽두부터 “천주교인은 비록 죽은 자일지라도 내 관내에 둘 수 없다”하며 천주교인의 묘에서 시체를 파내어 모두 불태워버리거나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배교를 명령하고 배교하지 않은 나가사키의 신자 64명을 체포하여 운젠 지옥으로 끌고 갔다.
그 중 여자가 27명이었는데, 모두 발가벗겨 두 팔을 묶고 두 발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등에다 열탕의 물을 끼얹으며 배교를 강요하였다. 운젠 지옥 유황천의 물은 부식력이 강하여 등에다 퍼부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온몸의 살이 썩고 흠집투성이가 되는 것이었다. 이 고문은 밤낮 없이 계속되었다.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한 사람, 한 사람 죽어가거나 배교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그 고통을 이겨낸 한 부인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한국인 부인인 엘리사벳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 5명씩 조를 나누어 고문을 하였는데, 그 남편은 다른 조였다. 옥졸은 “네 남편은 이미 배교를 하였다. 너도 남편을 따라 배교를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저는 천국의 영원한 남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구원을 얻는다면 이 세상의 남편을 쫓을 필요가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옥졸들은 그녀를 유황천가로 데리고 갔다. 그 주변에는 이 천고 미증유의 혹형을 구경하기 위해 6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형졸은 거기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이 여자는 죽이기에 너무 아름다운 몸매다. 죽이기 전에 시간을 줄 테니 누구 데리고 가 욕보여라”하고 말하자 서로 엘라사벳을 끌고 가려고 몰려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분출하는 뜨거운 물방울이 내리쏟아졌다. 그 때문에 군중들은 엘리사벳을 잡을 겨를도 없이 서로 죽지 않으려고 도망쳐갔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분출하는 유황천의 수증기속으로 몸에서 빛이 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 보고 그들은 더욱 깜짝 놀라 도망을 쳤었다. 다음날 그녀는 또 유황천가로 끌려갔다.
형졸은 그녀를 2시간쯤 뜨거운 돌 위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는 목에 돌을 매달고 입에도 돌을 넣어 재갈을 물린 다음, 머리 위에다 큰 돌을 얹어 놓으며 “만약 이 돌이 머리에서 떨어진다면 네가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그녀는 “아니오, 돌이 떨어질 리가 없습니다. 돌이 저절로 움직여 떨어진다 할지라도 제 마음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돌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제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그녀의 말대로 돌은 머리에서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그 돌의 무게도 그녀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음날도 밤을 새워 기도를 드리면서 사람들이 본 그 어린 천사의 모습을 구름 속에서 보고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고통을 통하여 신앙심이 더욱 굳혀져 갔다. 날이 밝자 형졸들은 다시 그녀의 옷을 벗기고 맨살에 열탕의 물을 끼얹는 형벌을 가하였다.
그 혹독한 형벌에도 그녀가 굴하지 않는 것을 본 형졸들은 악이 치밀어 “네가 굴할 때까지 10년이든 20년이든 형벌을 계속하리라”고 하자, 그녀는 “10년 20년은 너무 짧습니다. 1백년이라도 살아 있기만 한다면 저는 천주님의 뜻에 따라 이 고통을 참아낼 것입니다』고 하였다. 13일 동안 고문을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자, 형졸들은 그녀를 나가사키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산중에서 10여 일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여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서지도 못하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녀는 마침내 나가사키 부꾜 앞에 끌려갔다. 그녀를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안 관원들은 억지로 그녀의 손을 끌어다 배교문서에 손도장을 찍고는 그녀를 풀어주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운젠 유황 지옥의 그 혹독한 고문과 형벌 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주를 증거하며 고통을 이겨낸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엘리사벳은 지금도 일본 천주교회사에서 가장 빛나는 증거자, 최후의 승리자로서 높이 찬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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