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이 말씀은 초대 사도교회의 모든 신자들을 상대로 한 훈시로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마르코복음서가 ‘제자들과 군중을 불러 놓고’라고 한 것은 이 말씀을 한 필립비카이사리아 지방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군중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난 중에 있던 교회공동체를 겨냥한 말씀으로 봐야 한다. 하여간 이 대목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인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님의 수난예언 뒤에 나오는 것은 주님의 수난을 용납하지 못하고 안이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던 베드로와 동료 제자들에게 새롭고도 어려움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자는 두 가지 조건을 채워야 한다. 하나는 자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희망과 계획보다 제자된 것을 더 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십자가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목숨까지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뒤를 따른다는 말의 원어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할 때의 ‘물러가라’라는 단어와 꼭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 그러니 예수의 수난을 반대하여 사탄이란 지적을 받았던 베드로에게 떠나가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고 앞길을 막는 노릇(사탄의 노릇)을 버리고 내 뒤를 따르라는 뜻이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뒤 따라야 하는 제자 되는 조건은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형장으로 가는 모습으로 실사되어 있듯이(마르 15,21) 사도교회 사람들에게는 죽음을 당하는 길로 생생하게 기억되었고 이 조건은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여러 번 반복되었다(마태 10,38). 그래서 고난을 받던 초대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신앙 때문에 겪어야 할 고난의 길로 인식하게 되었고 고난을 극복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면서 제자가 된 사람의 표시는 십자가가 되었고 이 표는 구약성서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 이마에 받은 ‘tau’(십자)표를(9,4 이하)상징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요구는 예수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며 그 분은 반대자들의 손에 넘겨져 수난당하실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제자들이 당할 온갖 환란과 시련을 견디어야 하며 심지어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까지를 해야 한다는 교훈이 된다.
제자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을 토대로 참 삶에 대한 근본 태도가 제시된다.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게 되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다. 목숨에 대해서는 단순히 죽고사는 두 가지가 대조되어 있다. 그러니 헬레니즘적인 이분법 운운하는 학문적 구분에서 어렵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생활의 삶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그 생활의 삶의 본뜻을 가르치신 것뿐이다. 삶의 묘리는 일반적인 생활지혜가 말하는 대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것은 결국 삶의 목표를 잃게 되며 반대로 지정한 삶은 목숨을 희생하며 살아 나아가는데서 그 진가가 발휘된다.
유대아 문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유행되고 있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 스스로 죽어야한다. 문: 죽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 뜻있게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뜻있게’ 사는 것을 ‘나를 위하여’ 또 내 복음을 위하여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는 사람을 살리러 온 분이며 그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숨은 온 세상보다 크며 예수와 그 복음보다 작다라는 수식이 성립된다. 이 세상에서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생명을 대신할 만한 재물이나 명예는 없다(시편 49장 참조). 그런데 이 세대는 부와 명예를 좇아 하느님을 배반하고 있다.
하느님을 배신하는 민족을 구약성에서는 ‘죄 많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였다.
여기서 생명을 잃을 부류와 생명을 얻어 하느님의 영광을 받을 사람들이 가려진다. 전자는 ‘나를 모른다’고 할 배신자이고 후자는 부와 명예를 좇지 않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마태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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