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 이는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인류의 새 역사가 시작된 날이다.
그러나 마르코는 위대한 대사건을 담담하게 그날에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은 인간의 붓이나 입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 명의 부인들이 안식일 다음날 아침 일찍이 예수가 묻히신 무덤에 갔다. 예수의 시체에 향료를 발라드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수의 시체는 그곳에 없었다. “전에 말씀하신 대로”(예수님은 여러 번 당신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한다고 말씀하신바 있었다.) 부활하셨다.
그러나 향료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은,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첫째 무거운 돌문이 열려 있었고, 둘째 흰 옷을 입은 천사가 오른편에 앉아 있었으며, 셋째는 예수님의 시체는 거기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쳤고 너무도 무서워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다”
이것은 저들이 부활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않았고 따라서 예측도 못했으며 그러기에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믿기는커녕 오히려 그 사실로 해서 겁에 질렸고 너무나 무서워 말을 못할 정도로 덜덜 떨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전혀 예상조차 못한 것은 사도들도 마찬가지였다. 루가복음에는 여자들이 부활한 사실을 전했을 때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 믿지 않았다”(24,11)고 전한다.
사실 이 부활사건이 얼마나 믿기가 어려운 일인지 사도들은 낙담하고 다른 제자들도 암울한 심사가 되어 제각기 자기 갈 길로 흩어지려 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과 대화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루카 24,13-35 참조).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도 없는 묘비명(墓碑銘)은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적인 얕은 생각으로 부활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조작설(造作說)이 나돌기도 했으며(마태 28,11-15 참조), 가사설(假死說)도 있었고 (요한 19,31-37 참조), 그밖에 환각설(幻覺說)등이 난무했던 것 같으나, 모두가 엄연한 현실 앞에는 한때의 인간적인 의혹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법이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지금도 여기 살아 계신다. 세기를 통한 그 많은 신자들은 무엇을 보고 그렇게도 확신에 찬 신앙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1코린 15,14)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 누구든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질 때 그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바뀐다. 그것이 바로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하는 요인 이다. 진정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그 어떠한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의 어떠한 세력이나 역경, 박해까지도 이길 수 있는 진리의 자유를 누리는 용기와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 이 부활신앙은 이세상의 어떠한 권력이나 사상, 주의(主義), 등에서도 볼 수 없는 하느님의 능력과 확신을 가진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확신이 선 사람은 인생의 본질과 삶의 근본을 통찰하고, 세계와 우주까지도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흉악한 인간이 선한 인간으로, 비난받던 사람이 고상한 인격자로, 불목하던 자들이 화목과 평화의 소유자로, 탐욕스런 이기주의자가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사랑의 화신으로 변화되는 이 부활신앙은 이세상의 그 어떠한 힘으로도, 즉 윤리나 도독, 정치적 수단이나 권력, 원자탄이나 우주선의 위력으로도 이룩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하루아침에 이룩할 수 있는 기적을 낳았다.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새 역사의 물결을 우리들의 선조들의 믿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복음을 듣고(복음의 핵심과 정점은 부활이다)새 기쁨과 새 평화를 얻어, 뜨거운 사랑을 지니면서도, 어떠한 힘에도(정치적인 권력이나 죽음의 위험 앞에서 까지도)굴하지 않는 하늘의 힘을 지닌 사명인으로, 역사의 어둠을 헤치고 우리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새로운 빛(사랑, 기쁨, 평화)을 전했다.
우리도 부활을 연례행사의 축제로만 넘기지 말고 다시 한번 우리 신앙을 이 부활의 확신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새 역사를 펼쳐 나가는 사명인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자. ‘사도행전’은 사도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적으로 기록한 행전이 돼야 한다.
그것은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천한자로 묻히지만 영광스런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나며,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1코린 15,42-44)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1코린 15,57).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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