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 부활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신비를 묵상하려고 한다.
환호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다
예수께서 백성을 가운데 나타나셔서 복음을 선포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넋을 잃고 그분의 행적을 경탄해 마지않았다.(루카 4,15:마르 1,27-28) 도시와 시골이 발칵 뒤집힐 정도로 예수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을 들으러 호숫가로 몰려드는 바람에 그분이 배 위에 앉아서 가르침을 베푸셔야 할 정도였고(마르 3,9)그분이 계신 가정집에서까지 밀어닥쳤던 것이다(마르 2,2 이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요약되는 신상수훈(마태 5-7)을 베푸시자 군중은 경탄해 마지않았다(7,28)한마디로 군중이 예수께 사로잡혔다. 군중은 예수를 ‘예언자’(루카 7,16:마태 21,11)로 여겨 그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분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마태 21,9)
그렇지만 예수의 공적인 활동기간은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예수의 복음선포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친척들이 예수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했고(마르 3,21) 고향 사람들도 구원을 알리는 그분의 기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6,1 이하)
가다라 지방 사람들은 악마에 사로잡혀 고생하던 두 불행한 사람을 치유하신 예수님을 자기네 고장에서 추방까지 했는데(마태 8,24) 그들은 사람의 생명보다 재산을 더 중요하게 어겼던 것이다. 제자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람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치시려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으니(마르 8,17-18) 남을 위한 고통을 겁냈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의 지도자들은 법이 인격의 존엄성과 사람의 인격을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삼아 법을 악용하는 집권층의 만행을 그냥 방관하는 태도 역시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외면하는 이기적인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결국 유다가 스승을 배반하고 베드로도 그분을 부인하고 말았다.
환호하던 군중(마르 11,9)이 대사제들의 노리개가 되어 변덕을 부린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마르 15,13-14). 자기의 이해타산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하려는 사람 역시 그 대사제들이나 다름없다. 총독 빌라도도 시비를 가릴 생각은 하지 않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진리를 외면한 채 군중의 뜻에 굴복하고 있다.
그가 가진 사면의 혜택은 무죄하신 예수께 주어지지 않고 살인자요 폭도인 바라빠에게 내려졌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라빠가 치러야 할 죗값을 짊어지신다. 원수를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원수를 용서하시면서 운명하셨다(루카 23,34). 예수의 죽음은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이사 53,12) ‘야훼’의 모습을 닮았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죄 속죄행위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부활하셨다’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의 구원의 뜻에 순종한 예수(마태 26,42:필립 2,8)를 성령의 힘으로(로마 8,11) 부활시켰다. 십자가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을 창조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고… 부활하셨다”(1코린 15,3)고 신앙고백을 했다.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죽음이 속죄의 힘을 지닌다는 것을 입증한다. 초대 교회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야훼의 종’(이사 53,10-12)에 비추어 예수의 죽음을 인류를 위해, 인류를 대신해서 속죄한 구원사건(마르 10,45:14,24:1티모 2,6:1베드 2,22-24)으로 알아들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죗값을 당신의 죽음으로써 우리 대신에 치루셨다. 예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신다.(갈라 2,20) 이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아(사도 5,31) 자기 자신과 이기적인 생활 원칙, 불의 폭력,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새 사람으로 창조된다.
부활은 희생의 보답
“그리스도께서 삼일 째 부활하셨다”(1코린 15,4). 삼일 째란 말은 연대(年代)상으로 그분이 죽으신 후부터 부활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적절한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의 힘을 발휘하시는 날을 뜻한다. 구약성서에서 ‘셋째날’이 그런 뜻으로 사용되었으니 호세아가 “야훼께서 우리를 치시지만… 사흘이 멀다하고 다시 일으켜 주시리니”(6,1-2)라고 예언했다(참조: 창세 22,4:탈출 19,11-16)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에 순종하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시지 않게 빨리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길임을 증명하셨다.
사도 증거에 입각한 그리스도 부활 신앙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1코린 15,5-9)
부활은 그 증인들에게는 발현으로 체험된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자신을 부활하신 분으로 드러내셨다. 주께서 불멸하는, 영적인,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1코린 15,44-45:필립 3,21)으로 나타나셔서 사도들이 그분을 볼 수 있었다.(루카 24,36-39:사도 1,3) 주님의 발현은 그분의 구원의 현존을 가리키고 부활의 힘을 갖는다. 예를 들면, 발현이 스승을 배신한 베드로를 회개시키고 사도직에 다시 불러 스승의 부활을 선포하게 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박해했던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써 신자가 되었고 사도직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사도들의 극적인 삶의 변화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의 신앙을 받아들임이 아니라 그들이 충실한 신앙생활로 부활을 증거한데에 의존한다. 부활증거를 통한 우리의 신앙체험이 교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부활은 역사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입증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앙과 삶이 사건이다.
세례로 부활생명 받아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로 보증한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이다”(1코린 15,22).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성령을 시켜 우리의 죽을 몸을 부활시키실 것이다. (로마 8,11)
죄의 지배를 받던 우리 자신이 세례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우리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서 이미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게 되었다(로마 6,1-14).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을 위해 사시듯이 우리도 주님을 따라 하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조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을 바치면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부활의 새생명을 베푸신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축일을 지내면서 세례 때 우리 안에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우리의 일상생활에 구현해야 하겠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갈라 2,19-20).
부활은 우리의 세계와 역사를 근본적으로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부활은 불의와 증오와 폭력이 판을 치는 이 부조리와 실망과 고통의 세상에서도 정의와 사랑이 승리한다는 희망을 준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바치는 나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을 받는 길임이 부활로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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