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사도 토마의 솔직한 고백은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신을 변명하기 위한 방패로 사용해 왔다. 그것은 심히 잘못된 해석이며 성경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이 그렇게 믿기 어려운 것이다. 사도들도 부활을 믿지 못했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무덤에서 목격하고 그 즉시로 사도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이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으려하지 않았다”(마르 16,10-11).
그뿐만 아니라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일(부활)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 하고 믿지 않았다”(루카 24,10-11).
인간은 그 어떠한 사람이든 간에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또 그렇게 쉽게 믿어질 수도 없는 법이다. 그 믿기 어려운 사실을, 믿어지게 되기까지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일수 밖에는 없다. 특히 성령의 불길이 그 사람의 가슴을 불사를 때만이 가능하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오늘의 제2독서) 사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다. 인간의 의식작용은 오히려 논리적인 이론만을 고집함으로써 비논리적이요, 비합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엄연하고 엄숙한 현실 앞에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게 마련이다. 특히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계속 생각하고 분석하고 그래도 결론이 내려지지 않기 때문에 다시 회의에 빠지고 모순을 느낀 나머지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빠지고 만다. 이렇게 인간의 머리는 지식으로 해서 병들었다.
그래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에 대해서도 계속 의심하고, 따지며 결국은 부정하기에 이른다. 특히 지식인은 자아가 강하다. 그자아란 부정(否定)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계속 부정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는 그 누구도 이 부정과 회의의 늪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끝까지 몰고 갔을 때, 부정에 한계가 이르러 두 손을 든 순간 성령은 바로 그를 인도하신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복음의 말씀은 단순한 ‘토마의 불신’이 아니라 참으로 성령께서 얼마나 오묘하게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깨뜨리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장면인 것이다.
쉽게 휩쓸리는 자는 자아가 소멸되지 않는다. 자아가 부서지기 전에는 믿음이란 자리잡을 수 없다. 그래서 쉽게 떠나버리고 만다. 그것은 일종의 부화뇌동 (附和雷同) 일뿐 참 믿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심안 (心眼) 이 열리지 않으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듯(루카 24,13-35 참조) 토마도 수 없이 예수님을 만났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 지적과 육(肉)을 가지고 예수를 만났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영으로써 예수님을 만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다. 그러기에 스승은 불신의 제자를 나무라지 않으신다. “토마야,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 얼마나 자애 넘치니 스승의 모습인가? 누가 여기에 감동치 않겠는가? 토마는 끓어오르는 감격과 언어를 초월한 신앙의 불길로 해서 말문이 막혀 다만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외칠 뿐이다. 스승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의 음성은 굳었던 제자의 마음을 녹일 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영안(靈眼)을 가진 자에게도 강한 자비의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이렇게 부르짖는 믿음의 제자는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오늘도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감도를 받는 참 믿음의 제자가 나타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이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세상을 이겨 낸다”
승리하는 삶을 살려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동시에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 그때 ‘놀라운 기적은 나타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게’ 된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따라서 우리는 토마 사도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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