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 손골성지에 있는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 성상.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수련생 같은 이 키 작은 신부는 조그만 기적들을 행한다. 그 착한 마음씨에다 온갖 정력까지 다 쏟아서 교우들을 훌륭하게 돌볼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 성체께 대한 신심과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대단히 잘 가르치고 있다.” 베르뇌 주교는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경기도 용인 손골에 머물며 그 지역을 사목한 성인의 모습을 설명하면서다.
교구 제1대리구 신봉동본당 주보성인인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은 생전 누구보다도 성실히 순명한 인물이었다. 꾸준한 노력으로 신학생이 된 것부터가 그렇다.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교구의 한 마을에서 태어난 성인은 성적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스스로 매일 새벽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평신도를 찾아가 라틴어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해 결국 소신학교에 들어가 우등생이 되기까지 했다.
신학생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857년 10월 앙굴렘에 있는 대신학교에 들어간 성인은 뛰어난 순명정신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또 일찍부터 선교 신부가 되길 갈망했고, 그러한 사실을 성인은 그의 고해신부에게 상담했다. 고해신부는 1859년 직접 주선해 성인이 소속 교구를 떠나 선교 신부가 돼도 좋다는 주교의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성인은 1859년 8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1862년 6월 14일 사제품을 받았다. 자신의 전교지인 조선에 극심한 박해가 가해지고 있음을 알았지만, 성인은 지체하지 않고 그해 8월 18일 조선으로 떠났다.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1년 가까이 걸려 1863년 6월, 성인은 조선 땅을 밟았다. 손골에서 우리말과 문화를 익힌 성인은 1864년 9월부터 경기도의 한 구역을 맡아 사목했다.
그러다 1866년 성인이 수원의 샘골에서 사목하고 있을 때였다. 성인은 베르뇌 주교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다블뤼 주교가 있던 신리마을로 갔다. 자신은 잡혀 들어가도, 자신이 사목하던 신자들은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성인을 포함해 당시 다블뤼 주교 집에 있던 신부들은 모두 체포됐다.
주리 틀림을 비롯해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하느님께 순명한 성인은 결국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수영의 갈매못 사형장에서 참수당했다. 그때 성인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 특히 성인이 순교한 날은 성금요일로, 사형이 집행된 시각이 예수가 운명한 시각과 같았다고 한다.
그토록 하느님께 순명한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됐다.
성인이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우리말과 문화를 익히고 선교활동을 펼쳤던 손골성지(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에서는 현재도 그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