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젠 순례를 마친 우리는 베드로와 미카엘이 순교한 구찌노쓰(口ノ津)를 향해 가는 도중 1637년에 일어난 시마바라(島原)난의 격전지였던 하라쇼(原城)에 들렀다. 시마바라 난은 영주 마쓰구라 시계마사(松會重政)와 그 아들 시계쓰구(重次)의 가렴주구와 학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이때 농민의 대부분이 천주교인이었고, 그 난의 지도자가 천주교인인 16세의 어린 소년 아마구 사시로(天草四郞)이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된 후 천주교인들은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때문에 시마바라의 난을 ‘기리스단 박멸의 혈제(血祭)’라고도 하며 농민 항전, 또는 기리스단 항전이라고도 한다. 하라쇼는 삼면이 바다로 된 요새였다. 거기에는 이 난의 영웅 아마구 사시로의 동상이 서있고, 저쪽으로 순교자의 묘가 4개 있었다. 당시 이 시마바라에는 임란 때 잡혀온 우리 동포가 천주교를 신앙하며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도 처참하게 처형 또는 순교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찌노쓰는 오무라 스미다다(大村純直)의 큰형 아리마 요시사다(有馬義貞)가 1562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개항을 하고, 1563년 선교사 아르메이다가 들어와 교회를 세우고 2백50명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서구문명의 도입창구 및 천주교의 요람지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순교한 두 사람의 한국인 농부 베드로와 미카엘의 순교지를 찾아 나섰다. 이시바시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 순교지는 해양자료관으로 들어가는 일구라는 것이다. 그 현장을 찾아가 보니, 지금은 불교신자들의 공동묘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흑 어떤 유적의 단서라도 발견할까 하고 여러 모로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곳이 그들의 순교지라는 사실만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다음 순례자들 위해 순교현양비는 아닐지라도 어떤 표석이라도 하나 세워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 성립이전에 피랍돼 이국땅에서 순교한 분들이기에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거의 소외되어 있지만, 왠지 아쉬운 마음이 남았었다.
배교자인 시마바라의 영주 아리마나 호스미(미카엘)가 노베나까(延岡)로 떠나가고 새로 나가사키부꾜(奉行)로 부임한 하세가와(長谷川)에 의하여 1614년 11월 22일 구찌노쓰에서는 22명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구찌노쓰의 대순교’라고 부른다. 이 22명중에 한국인 농부 베드로와 미카엘이 들어 있다.
미카엘은 임진왜란 때 나가사키로 잡혀와 노예로 팔리었다. 그러나 기리스단들의 노력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구찌노쓰로 와 살며 영세하였다. 그는 천주교의 교리에 밝았기 때문에 유력한 기리스단들의 원조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인이 된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또 함께 잡혀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누이동생을 사서 풀어주기 위하여 그는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돈을 모으고 또 거기서 결혼도 하였다. 그는 병든 사람, 특히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나병환자들을 깊은 사랑으로 돌보며 마치 친형제와 같이 집으로 데리고 와 식사도 함께 하곤 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아나쓰리’라는 고문을 받았다. 이것은 몸을 꽁꽁 묶어서 거꾸로 매달고 머리를 파놓은 굴속에 처넣는 형벌이다. 그는 이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형리는 발가벗겨 온몸을 갈퀴로 할퀴고 다리를 묶고 무릎을 잘랐다. 이런 혹독한 고문을 받는 동안에 숨이 끊어졌는데도 형리는 다시 목을 베고 몸통을 토막내어 버리었다. 이때 미카엘의 나이 43세였다.
또 미카엘에게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신비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구찌노쓰에 형리들이 내려와 박해가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미카엘은 자기도 머지않아 잡혀서 고문을 받고 죽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때가 지났는데도 밭에다 보리를 갈고 있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체포되어 죽었는데, 그가 심어놓은 보리는 때늦게 심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찍 심은 다른 사람의 보리보다 더 빨리 잘 자라서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이삭이 팼다. 이것을 본 다른 농부들은 깜짝 놀라면서 이 보리를 베어가지고 자기 밭으로 가져갔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렇게 베어간 뒤에도 두 번, 세 번 또 이삭이 나온 것이었다. 당시 이 사실을 본 베드로 모레흔 신부는 “이 일로 말미암아 기리스단들은 큰 용기를 얻었다. 찬바람 부는 박해 속에서도 많은 훌륭한 기리스단 증거자의 피에 의하여 일본에 있어서 복음의 씨앗은 날로 자라서 붙어날 것이며 순교자의 이삭은 아무리 베고 또 베어도 새로운 싹이 피어나, 한 알이 1백알, 1천알이되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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