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는 일본의 ‘소(小) 로마’라 한다. 그만큼 일본 천주교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명치 (明治)시대까지의 천주교를 ‘기리시단(切支丹)’이라고 하는데, 기리시단이 나가사키에 들어온 것은 1567년 아르메이다 수사가 1년간 머무르며 전교를 한데서 비롯된다. 이때 약5백여 명의 신자가 나왔고, 그 후 1569년에는 신자가 1천5백여 명으로 불어나 영주로부터 기증받은 절을 개조하여 교회를 짓고 ‘토도스 오스 산토스’(포르투갈 말로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라는 뜻) 라고 이름하였다.
나가사키가 본격적으로 기리시단의 본고장이 되기 시작한 것은 1580년 이곳의 기리시단 다이묘(大名)인 오무라스 미다다(大村純忠)가 나가사키를 예수회의 교회령으로 기증하면서부터였다.
1605년까지 이곳에는 성 바오로, 성 죠안 밥티스타, 산타 마리아, 성 베드로, 산디아고, 성 미카엘, 성 도밍고, 성 안토니오, 성 프란치스코, 산타 그라라, 성 노렌조 등 10여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 중에 성 노렌조는 지금 나시사키(西坂) 공원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조선인의 교회였다.
또 대신학교와 주교활자인쇄소와 소신학교 등이 옮겨와 나가사키는 명실공히 일본의 ‘소(小)로마’가 되었다.
1587년 도요도미 히데요시(豊巨秀吉)는 갑자기 천주교를 금하고 20일 이내에 일본을 떠나라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었다. 그가 이런 금령을 내린 것은 한 미모의 여인을 첩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그녀가 천주교인으로 계율에 따라 정조를 지키며 끝내 거절하므로 천주교를 미워한 데서 온 것이라 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일본을 떠나지 않고 곳곳에 숨어서 전교를 하고 있었다.
한편 이보다 앞서 일본의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내에 있는 죄수나 종을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고 그 대가로 총포를 사들이는 노예매매가 성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총포로 임진왜란 때 우리를 첨략해 온 것이다.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이 비인도적인 노예매매를 엄금하도록 건의하여 노예매매를 금하는 엄명이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금령은 유명무실하게 되고, 왜군은 조선의 어린 아이ㆍ부녀자까지를 노예로 팔아먹기 위하여 포로라는 이름으로 마구 잡아왔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기리시단 다이묘들에게 만약 비인도적인 노예매매 행위를 계속하면 파문을 하겠다고 경고하고 조선인 노예제운동을 일으켜, 많은 조선인 포로를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은 대부분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이국땅에 잡혀와 갖은 천대와 학대를 받으며 모진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그들은 심리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도 마음을 의지하고 영혼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천주교뿐이었을 것이다. 이때 나가사키에서는 한꺼번에 2천명이 세례를 받고, 선교사에 의하여 조선어로 된 교리서도 간행되고, 조선인 교회도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고라이 마찌(高麗町)라고 불렀던 것이다. 비록 천주교 금령이 내려져 있기는 하였지만, 이때까지는 별다른 큰 박해가 없었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도요도미 히데요시는 갑자기 1596년 선교사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이 명령으로 오사카(大阪)에서 5명, 교토(京都)에서 18명, 나머지 1명, 도합 24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교토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양쪽 귀와 코를 베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결국 이들은 한쪽 귀를 조금씩 잘려 피를 흘리며 오사카로부터 나가사키까지 8백km에 이르는 먼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그 사이 두 사람이 자원하여 26명이 되었다. 걷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하며 나가사키에 도착한 그들은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듯이 이니시사까(西坂) 언덕으로 올라왔다. 니시사까는 잡범들을 처형했던 사형장이었다. 거기에는 26개의 십자가가 서있었다.
형리들은 그들을 한 사람씩 십자가에 풀고 도망칠 수 있게 느석하게 묶었다. 그러나 아무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중에는 15세의 토마스 고사끼(小崎), 13세의 중국인 안토니오, 12세의 루드비꼬 이바라끼(茨木) 등 세 명의 소년이 있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루드비꼬 이바라끼가 바로 조선인인 바오로 이바라끼의 아들이다. 너무 어린 루드비꼬를 본 형리는 불쌍한 나머지 “네가 죽는 것은 천주교 때문이다. 천주교를 버려라”하고 말하자, 그는 “무사님도 천주교인이 되어 하늘나라에 오시는 것이 훨씬 좋은 일입니다”하며 그의 십자가에 달려가 입을 맞추었다. 형리가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 그의 양옆구리를 관통하여 숨이 끊어질 때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라고 루드비꼬의 순교는 일본 교회사상 가장 빛나는 순교로 찬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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