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비우는 사순, 화해 - 김지석 주교(전 원주교구장)
소신학교 시절 사순 시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은 조금 완화됐지만, 당시에는 단식재를 엄격하게 지켰다. 단식을 하는 김에 학생들에게 공복에 먹는 회충약을 한 알씩 나눠줬는데, 이것이 학생들을 참 힘들게 했다. 가뜩이나 단식을 지키고 있는데 회충약 때문에 부지런히 화장실을 가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사순 시기, 특히 성삼일에는 평소보다 전례도 많아서 성금요일 즈음에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곤 했다.
대신학교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성무일도를 노래로 바치니 기도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져 더 곤혹스러웠다. 나를 포함해서, 신학생들은 성무일도를 노래하는 중에도 화장실을 가곤했다. 그러다 파스카 성야를 지내고 잔칫상처럼 푸짐한 식사에 ‘진짜 부활이구나’ 하는,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물론 영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으로 그런 것이었지만.
지금이야 사순 시기의 금육재와 단식재도 조금 완화됐고, 약도 좋아져서 예전처럼 설사를 동반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신학교에도 그런 일은 없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이후로도 성주간만 되면 그렇게 고생해가며 힘들게 지켜온 전례 안에서 사순 시기의 의미를 곱씹게 되곤 했다.
단식의 의미는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옛 신학교의 학생들처럼 설사까지 해가며 극단적으로 비울 것까지는 없겠지만, 음식을 끊고 속을 비우면서 내 욕심을 비워내는 것이 단식이다. 단식재가 그저 자기 고통과 어려움을 감내하고 식비를 아껴서 돈을 모으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와 교회의 상황이 변하고, 전례가 변하기는 했지만 사순 시기의 정신은 변함이 없다. 사순 시기에 고신극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통회와 회개다. 회개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들어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건데, 그게 바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나누는 일을 거창하게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사순 시기에는 뭘 끊고, 크게 무언가를 해서 희사하고 이런 것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사순 시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해’하는 일이다.
사랑은 자기와 가까운 사람부터 하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면 다음은 자기 형제와 가족이고, 그 다음에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도 예물을 드리러 갈 때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오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서 성당에 나와 ‘사랑, 사랑’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니 기도도 자선도 모두 화해에 포함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족 중 누구 한 사람과 화해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순 시기를 잘 지낸 것이다. 화해와 용서.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이건 평신도뿐 아니라 수도자나 성직자도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교가 된 이후, 직무상 한 신부를 야단칠 일이 생긴 적이 있다. 주교라는 직분의 입장에서는 해야 할 소리를 한 것이고, 야단쳐야 할 부분을 야단친 것이다. 하지만 그 신부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힘든 일이고, 그 일로 그 신부와 내 관계가 틀어지게 된 것이다. 그때 내가 먼저 연락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러자 그 신부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입을 떼면 그때는 이미 잘잘못이나 시시비비는 따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저 화해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도 편해졌다. 그렇게 형제와 화해를 하는 것, 그것 한 가지라도 실천한다면 사순 시기의 의미를 잘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