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끼 신부님의 안내를 받아, 일본 26성인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26성인의 기록과 유물 및 일본 교회사의 값진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유끼 신부님은 도록 한권을 나에게 기증해 주었다. 그 유물들 중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우리나라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청동미륵반가상과 거의 비슷한 7세기경 한국제 청동미륵반가상과 ‘가꾸레 기리시단’(잠복 천주교인)들이 도자기로 구어낸 ‘마리아 관음상(觀音像)’ 등이었다.
마리아 관음상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시대로부터 명치시대에 이르기까지 천주교를 혹독하게 박해함으로 천주교인들이 겉으로는 일본의 국교인 불교를 믿는 척하면서 안으로는 천주교를 믿으며 만든 것인데, 얼핏 보면 관음보살상이다. 그러나 유심히 보면 십자가의 묵주를 목에 걸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다. 여기 전시돼 있는 것은 18ㆍ19세기 에도(江戶)시대에 히라또에서 구워낸 것이다.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일본에서 천주교가 얼마나 혹독하게 박해를 받았는가를 집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1967년 오이따(對紛)에서 발굴된 ‘기리시단 유물’이었다. 이 유물은 청동제 묵주를 항아리에 담아서 땅속에 파묻은 것인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상과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과 세 개의 개의 십자가와 여러 개의 묵주알 등이었다. 그런데 그 유물을 담은 항아리가 한국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항아리였다.
도꾸가와 시대에 이 나가사키에서의 천주교 박해는 처절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과 같이 5인조를 만들어 천주교인을 감시하고 색출해 내었다. 1627년경부터는 나가사키 부꾜(奉行)에 의하여 이른바 ‘애 후미(繪踏)’라는 것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놋쇠로 성상을 만들어 그것을 밟아보도록 하여 신자인가 아닌가를 구별해내는 방법이다. 운젠의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빈사 상태에 있는 갈바리오에게 성상을 밟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밟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로부터 이 제도가 시행된 것이다. 그리하여 길가는 사람을 불러 성상을 밟게 하여 밟으면 가게하고 밟지 않으면 천주교인으로 잡아 가두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2백5위의 복자가 있다. 그 중에 다께야 고스마, 그 아들 방지거 다께야, 안토니오, 그 아들 요한과 베드로, 가이오, 권빈센시오, 사스발 봐야즈, 가이오 지에몽 등 9위가 한국인이다. 이들도 모두 이곳 니시사까공원에서 순교하였다.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묶여 뜨거운 불에 태워죽이면 고통을 덜 받는다 하여 약한 불에 시심사심 오래 고통을 받게 하며 태워 죽였다. 당시 일본 관리들은 천주로부터 더 큰 숭앙을 받는다하여 되도록 배교하도록 유인을 하였고, 십자가에 묶을 때도 뜨거운 불에 고통을 견디기 어려우면 풀고 도망칠 수 있도록 허름하게 묶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치지 않고 그 잔인한 형벌을 인간의 의지, 아니 신앙의 큰 힘으로 끝까지 이겨내고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은 것이다.
나가사키에는 어느 곳이나 박해의 슬픈 이야기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리가 묵었던 가톨릭회관 맞은편에 우라가미(浦上) 천주교회가 있었다. 나가사키 주교좌성당이다. 이곳도 일본 교회사상「우라가미 천주교인 무너짐」이라고 하는 처절한 박해가 있었다. 그 동안 천주교를 박해하며 쇄국정책을 쓰던 일본이 1859년 일불통상조약(日佛通商條約)에 의해 나가사키 항구가 재개항이 되었다. 이에 1863년 페레 신부가 나가사키에 들어와 오우라(大浦) 천주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된 뒤, 1865년 3월 17일, 2백50여 년간 숨어서 우라가미에 살고 있던 농민 10여명이 성당을 찾아왔었다. 그들은 성모상 앞에 가서 경배하고 그 중에 한 부인이 피죤 신부에게 “우리도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하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것을 일본교회사에서는 ‘신자의 발견’이라고 한다. 이 신자들이 1867년 처절한 박해를 받고 순교한다. 이것이 우라가미에서 천주교인이 네 번째로 박해를 받아 무너지는 것이다.
다음날 우리는 오무가라(大村) 호꼬겐(放虎原) 순교지를 찾아갔다. 이 방호원에서는 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되었다. 그 중에서도 1657년 ‘고호리(郡)’라는 곳의 동굴 속에 숨어 있던 천주교인들이 발각됨으로 말미암아 천주교인 검거 선풍이 불어 1658년까지 6백8명의 천주교인이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1백31명이 여기서 참수되었다. 형리들은 천주교인의 시체를 그대로 묻으면 다시 살아난다 하여 죽은 사람일지라도 목을 베어 목은 목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따로 묻었다 한다. 그것이 오무라에 있는 목무덤(首塚) 과 몸통무덤(胴塚) 이었다. 이 무덤은 약2백m 떨어진 대숲 속에 각기 묻혀 있었다. 이 무명순교자들의 무덤 앞에서 숙연히 머리 숙여 기도하고 다음 순례지를 향해 길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순심대학(純心大學)과 콜베 성인 기념관을 순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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