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자신이 착한 목자였다. 그분은 당신의 말씀대로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그와 같은 사랑과 열성으로 양떼를 돌보는 목자를, 오늘의 교회는 목마르게 원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종교적 기만 등 온갖 유혹들이 세상 전체에 현란하게 깔려있는 현시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양들은 아직은 분별력이 없고 방향감각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다. 속이는 자들이 별의별 감언이설을 할 때 혹은 협박과 공갈을 칠 때 어린 가슴에 현혹되거나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타락은 어느 시대고 있었지만 특히 종교적인 타락과 기만 등은 현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만연돼가고 있다. 특히 ‘묵시록’을 들먹이며 종말의 날짜까지도 예언하면서 떠들어대는 현실이고 보면 착한 목자의 출현과 임무는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막중하고도 시급한 염원의 하나이다.
길 잃은 양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양들, 어디에 좋은 풀밭이 있는지를 분간치 못하는 양들을 위해 착한 목자는 바로 길이 돼주고 방향자체가 되어 앞장서야 하며 스스로가 기름진 풀밭이 되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리떼들이 어리고 순진한 양들을 잡아가고 살육하려 들 때 목숨을 걸고 지켜주고 구출해내야 한다. 따라서 목자가 된다는 것은 성숙한 지성과 완숙한 인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타는 사랑의 넋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가장 신비스런 초자연적인 생명을 감지한 사랑의 흐름이며 맥박이다. 그것은 이미 천상의 기쁨, 특히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알고 있는 영혼이 아직은 천상적 기쁨이나 부활의 환희를 알지 못하고 맛보지 못한 미지(未知)의 세계에 흘러 들어가는 천상의 감로수(甘露水)와 같은 것이며,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을 연결시키는 교량이기도 한 것이다. 착한 목자는 이렇게 양들의 사정을 자신의 일처럼 알고 있어야한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1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요한 6,53-58 참조)고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목자는 스스로의 살과 피를 깎아줄 정도로, 또 주님께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흘리신 것처럼 목자는 양을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돼 있어야 함을 뜻한다. 주님은 그 고귀하신 생명을 아니 당신 전존재를 양을 사랑하고 구하는데 쏟으셨다. 이는 가장 위대하고 초자연적 신비의 사랑을, 즉 양들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사랑의 신비를 나누어주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결코 어떤 물질적인 것, 계산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것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를 알게 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거나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대로 가슴을 감동시키는 사랑의 진동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처럼 어린이들은 사랑에 의해서만 참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 없이 자랄 때,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
양을 기르는 방법은 이와 같이 목숨을 건 불타는 사랑 외에는 달리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착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1)
풀은 누구나 먹일 수 있지만, 신비의 극치인 사랑은 오직 참된 목자만이 먹일 수 있다. 그때 양들은 병들지 않고, 방황하기 않으며, 좋은 풀을 먹게 되어 곧고 씩씩하게 자라난다. 이때 양은 자라나 또 하나의 목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곧 ‘신앙의 신비’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적’이다.
사도들은 분명 최초의 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분명히 목숨을 바친 목자들이었다. 그것은 천상의 신비,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것이다. 오늘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성령으로 가득차 부당하게 자신들을 재판하려는 법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우리가 불구자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 하는 경위에 관해서 심문을 하는데 불구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된 것입니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4, 8~12).
삯군은 많지만, 참된 목자는 적다. 참목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어야만 한다. 또한 그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3,1). 목자와 양은 바로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목자 밑에서 한 우리의 양’인 동시에 ‘하느님의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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