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고 또 내 말을 간직해 둔다면 무슨 소원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1-8)
나무에 붙어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의 일원으로 남아있음을 뜻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뜻이었다.
그것은 곧 자아(自我)의 소멸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 순간 자기에게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간다. 바로 그것을 말한다. 사도 바울로처럼, 그가 세례를 받을 때 이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하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뜻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자기 이기심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아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성당에 나오고 모든 교회의 전례에 열성적으로 참여는 해도 그의 마음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삶이 아닐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대적한 삶일 수밖에 없다. 육체와 외면(外面)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으로서 훌륭한 신심을 가졌다고 착각할지 모르나 사람의 심성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께서는(요한 2,25 참조) 그러한 믿음을 원치 않으신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아무런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도 근시안적이며 피상적이면서도 이기주의적이다. 물론 영안(靈眼)이 열리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이기심이 바로 큰 장애가 되어 참된 믿음, 즉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사시는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영적 체험도 없고 하느님에 대한 인식도 이론적인 지식에 의해서 추상적으로만 알뿐 그 깊이와 참뜻, 그리고 신앙의 기쁨과 축복을 모른다. 그것은 지식의 바벨탑을 쌓는 일은 될지언정 진정한 신앙은 아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이미 자아라는 옹졸한 테두리를 벗어났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힘차게 뻗어나간다.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있는가? 과연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먼저 내 안에 자아 (나) 가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자아 (나) 와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공존(共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할 수 없듯이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는 한, 결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포도나무와 하나가 되어 그 가지로서 자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그래서 참 신앙은 항상 새롭게 뻗어나가면서 끊임없는 창조의 세계를 열어간다.
오늘 제1독서에서의 예루살렘으로 간 사울(바울로)에 대한 기록도 그가 새롭게 태어나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지난날의 세속적인 영광이나 이권 등을 다 버리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면서까지도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리고 진정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포도나무의 수액을 받아 자나라는 가지의 특징은 ‘사랑의 계명’을 진실되이 실천하데 있다. 그것은 ‘말이나 혀끝으로’가 아닌 참된 신앙 안에서 우러나는 ‘행동’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진실된 행동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포도나무)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다”(1요한 3,19).
그러나 그와 같은 확신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때의 일이다. 우리의 믿음이 사랑 위에 서 있지 않는다면, 또 그 사랑이 실천적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런 확신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사랑에서 온다. 겉으로는 많은 자선행위를 한다 해도 내면으로 사랑이 없이 이기적인 행위의 하나로서 자선을 하는 것도 역시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은 자기만족을 위한 기만행위와도 같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께로 부터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3,22-24).
즉 사랑 안에 있을 때, 사랑을 생활화할 때, 우리는 포도나무와 하나가 된 것이다. 사랑에는 이기심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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