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가꾸시는 한그루의 포도나무이다. 그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기심으로 인해서 스스로 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의 힘으로 살려는 어리석음 속에서 살기에 실은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이처럼 혼미하고 싸늘해가고 있다. 인정도 없고 동정이나 자비가 사라진지 오래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 오늘의 복음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랑은 우선 인간의 탐욕에 의해 멀었던 눈을 뜨게 해준다. 그리고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만이 인간 자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고 참으로 인간의 소리를 듣게 되며 온갖 차별을 초월하여 오직 인간 그 자체 안에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창세 1,26 참조). 거기에는 빈부의 격차도 피부의 색깔도 인종의 차별도 없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속에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느낌으로 알게 된다.
즉 표현하지 않는 것, 또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까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사랑할 때만이 일어나는 놀라운 현상이다. 따라서 복음은 계속 우리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 15,10)
그러면 주님의 계명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 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요한 13,34). 오늘의 복음에서는 그 사랑의 구체성과 실천요강으로 목숨까지 바쳐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가장 큰 사랑을 스스로 모범으로 보이셨기 때문에 ‘인류의 주’가 되셨다. 왜 그분이 인류의 이상(理想)이 되었는가?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떠한 인간적 차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갈라 3,27-28).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제까지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뿐이라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리고, 이방인 고르넬리오를 개종시켜 한 형제로서 받아들인다. 이것은 유대 역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마치 하늘이 문이 열린 것처럼 이방인에게 전세계의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는 역사적인 대전환의 사건이다. 그것은 사도 베드로의 다음과 같은 말로써 시작된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며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그것은 만민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시켜 선포하신 평화의 복음입니다”(사도 10,34-36).
그 때 하느님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보이셨다. 즉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 성령이 모든 청중에게 내려 오셨다.…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사도 10,44-45). 이 때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일대 전환을 선포한다.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이 물로 세례를 받은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10,47)
이때부터 세상은 사랑에 의해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고 누구든 사랑 안에 머물 때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세계를 향해 힘차게 선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의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서슴없이 증언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외아들까지 우리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내주시고, 목숨까지 바침으로써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시기까지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요한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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