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할 때부터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는 대체로 끝났고 제자들과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에 대한 교육과정으로 넘어 간다. 첫 번째 수난예고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의 타볼산상에서의 영광현시로 매듭지어졌고 두 번째 수난예고는 또 다른 판국으로 사태가 옮겨간다는 서론이 된다.
이 예고에 이어 ‘집에 들어가’ 제자들과의 대화(마르 9,33-37),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사람들’의 성격(마르 9,38-41),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마르 9,42-56)는 등 일련의 교육이 뒤따른다. 이 일련의 동향과 교훈들은 복음서가 쓰이기 전부터 초생교회 안에서 전해져 왔고 또 아직 틀을 갖추지 못한 교회생활의 교리교육으로 삼아 왔었다.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표현을 마르코복음서는 가끔 쓰고 있는데 이것은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옮아간다는 것은 말할 때 쓰고 있다(마르 1,35:10,1).
여기서는 첫 번째 수난예고와 그 뒤따르는 상황이 매듭지어지고 두 번째 수난예고와 그 뒤따르는 상황으로 옮겨진다는 신호이며 동시에 예수께서 운명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난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타볼산에서의 변성용은 이뚜레아의 한적한 지방에서 있었고 이제 예수의 일행은 거기서부터 십자가산으로의 행진을 시작하게 된다.
하느님나라 전도의 주무대였던 갈릴래아는 벌써 예수에게는 위험지구가 되어 그곳을 빨리 지나야만 했고(마르 9,33) 그곳을 지나 유대아지방과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갔다가(마르 10,1) 예리고를 둘러서(마르 10,46) 예루살렘근교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 올리브산을 마주보고 있는 벳파게와 베타니아에서 성도입성을 준비하게 된다.
일단 여행의 목표가 성도 예루살렘으로 정해진 이상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다보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언성 교훈들을 해야 했다. 그 교훈들은 그들이 공동체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아가는 지침이기도 하였다. 이 점을 강조하려고 마태오복음서는 “제자들이 갈릴래아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결속하였다”(17,22)라고 적고 있다. 이 결속은 갈릴래아 각 지방에 흩어져있던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 형성을 뜻한다. 이 결속된 공동체사실은 곧 이어지는 ‘우리 편’ 교훈에서 드러난다.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예수의 교훈내용은 그 하나하나가 논리적으로 또는 조목조목으로 연결된 말씀이 아니고 하나하나가 산만하게 떨어져 있다. 그것은 이 말씀을 전하는 복음사가들이 예수와의 대화를 순진하고 단순하게 받아 들였다는 것을 말한다. 하여튼 그들은 이 교훈의 말씀을 공동체생활의 기초로 하여 교회를 발전시켜 나아갔다.
이들의 가슴깊이 새겨진 훈시는 서로 일치하라는 교훈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불일치의 원인은 견해 차이에서 발생된다. 견해 차이는 사태에 대한 인식부족에서 온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와 지상교회의 관계, 하늘의 영광과 지상의 치욕과의 관계 등 신비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국에서 누가 높아질 것이냐에 대하여 토론할 만큼 아직도 지상적인 영광을 꿈꾸며 예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지금은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십자가를 지러 성도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이 십자가 수난의 교리를 그들에게 깨우치고 심중에 새겨 주어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지금 내가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잘 간직 하여라, 이제 사람의 아들이 곧 사람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전에도 한번 들은 바 있는 이 말씀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 다니며 보고 듣고 한 훌륭한 말씀 그리고 군중들이 예수의 언행에서 하느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대조적이다. 옛날에 다윗성왕은: “이 몸을 야훼님께 내 맡기겠소, 사람에게는 결코 맡기지 않겠소”(사무라 24,14) 라고 한 말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집회서에서도 같은 말을 읽게 된다. “자신을 인간의 손에 내맡기지 말고 주님의 손에 맡기자” (2,18)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제자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지금까지 신나기만 하던 그들은 무엇인가 먹구름이 심각하게 드리우고 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이 수난의 신비를 깨우치지 못하였다.
예수의 십자가의 길은 우연히 맞게 되는 불행한 운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는 중대한 사명완수였다. 과연 그러한 수난과 멸시를 받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는 없는 일인가. 그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왜 죄가 허용되어 우리가 죄와 싸워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몸소 고통의 길을 걸으면서 제자들을 깨우치려는 구원의 신비이다.
죄와의 싸움이 없는 구원, 고통이 없는 영광, 이것은 먹고 살다가 죽어가는 동물세계의 법칙이요, 비오면 땅이 짙어지는 자연법칙일 뿐이지 인간사회는 아니다. 제자들은 이 신비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슬픔에 잠겼고 감히 무엇을 물어볼 생각도 없이 침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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