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은, 이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복음 선포의 역군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코린 9,16)라고 단언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 오르시면서 하신 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이 곧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기쁜 소식)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제1독서에서는 예수님의 승천하시던 때의 모습을 상세히 전해준다. 그 자리에서도 주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라고 복음 선포의 사명에 대해 간곡하신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결코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입으로’ 전하고 ‘행동으로’ 증거해야 한다. 주님은, 신앙이 단순한 정신적인 면에서의 ‘믿음’이라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자체가 완전히 탈바꿈 되어 말이나 생각은 물론 행동으로서 사랑이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복음 전반에 걸쳐 말씀하셨다.
첫째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고 하심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간상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삶의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길만을 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한다.
즉 이것은 썩어야 할 것들이 썩지 않는 것으로 변하고, 시간이 영원으로 변하며, 육(肉)이 영(靈)으로 변하는 일대 대전환과 새로운 지평(地平)을 여는 대역사를 뜻한다.
둘째는 자아(自我)의 부정이다. 새로운 삶이란 이기심에서 죽고 이타심에서의 삶이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 12,25). 그리하여 죽기까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마태 24,45-51 참조)
셋째는 곧 그러한 삶으로써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될 것을 요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선포의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입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라는 구호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즉 복음선포는 행동으로 삶의 모범으로 보임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그러한 행위를 따르게 함에 있다.
그렇게 행동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사람과 어딘가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성령을 내려주셨다. 앞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이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오늘의 제2독서에서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내려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여러분이 물려받은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에페 1,17-18)를 알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성령)”(에페 1,19)에 대해서도 자각하기를 바란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온 세상 만민을 한 가족으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가면서 평화를 이루어 갈 것과 서로 관대한 마음이 도어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목적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호소한다.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다하여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성령께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신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2-6).
여기에서 우리는 온 인류가 한 형제라는 이유를 알게 된다. 아버지가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라도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다. 다만 저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역시 우리도 한분이신 아버지께서 낳아주신 자들이니 어찌 한 형제가 아니겠는가? 아버지를 모르고 고아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절대적인 사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사명완수를 위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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