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일행은 갈릴래아를 편력하다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이 도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의 집이 있는 곳이며(마르 1,29) 예수께서 이 집을 거주지로 삼아(마태 13,1·36:마르 2,1) 선교활동을 하셨고 이 도시에서 세금을 바쳤다(마태 17,25). 그러니 그들이 들어간 집은 예수의 근거지인 베드로의 집이다.
예수께서 이 집에 들어가셨다는 언급이 처음 나온 것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던 때이고 (마태8, 14:마루1, 29:루가4, 38) 그 후 여러 번 이 집에 들렀고(마르 2,1: 3,20: 마태 13,36) 이번은 마지막으로 집에 들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가 앉으시고 열두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이 모습은 사도교회의 발생당시의 모습이다. 그들은 집에 모여 주님의 지시를 따라 성찬례를 행하였고 주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그들 앞에 앉은 모습은 교회의 머리로서 가르치는 선생님의 모습이다. 군중이 많이 모여 들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가르치셨다.(마르 4,1)
제자들은 예수를 따라 길을 오면서 서로 논쟁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짐짓 무엇 때문에 다투었느냐고 물으셨다. 그 길은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가는 길이었다. 예수님의 생각은 온통 수난에 대처할 각오를 다지는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토론하고 있었다. 주님이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 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가신 일들이 이러한 서열문제를 야기시켰는지는 모른다. 이 문제는 초생교회가 첫 걸음마를 할 때에 대두되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는 최후 만찬석상에서도 논쟁거리로 재연되었다(루카 22,24).
유대아인들의 랍비신학에서 이미 이런 문제를 취급하고 있었다.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누고 가장 높은 자리에 속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에쎄네파의 꿈란 공동체에서도 저 제상에서의 확고한 서열을 정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도 가끔 하늘나라에서의 서열에 관해 언급하셨다(마태 5,19:11,11). 제베대오의 아들들도 하늘나라에서 첫째 자리를 청원하였다(마르 10,37).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첫째냐에 관한 논쟁은 초생교회 공동체의 서열관계를 반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수난의 길을 따라가면서 세상의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질문은 책망조가 아니었다. 교회서열에 관한 문제제기의 성격이 있다.
‘열둘을 불러 모으시고’라는 표현은 특별한 뜻이 있다. ‘열둘’을 뽑아 사도로 지명하실 때 이 표현을 했고(마태 10,5:마르 3,14: 루카 6,13)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 비유를 설명할 때 이 표현을 했고(마르 4,10) 열둘을 파견 할 때 이 표현을 했으며(마르 6,7) 세 번째 수난예고를 할 때 이 표현을 했다(마태 20,17).
이번에는 교회의 서열관계를 정해 줄때 이 표현을 쓴 것을 관찰한다면 열둘을 불러 놓는 행위는 교회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이 표현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열둘을 데리고 십자가의 길을 갈 것이며(마르 10,32: 11,11) 그들과 함께 최후의 성착식을 가질 것이다. (마르 14,17)
서열에 관한 예수의 훈계말씀은 초생교회를 세상의 단체와는 달리 하느님 나라로 건설하는 초석이 되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세상의 나라는 힘으로 통치자가 되어 힘으로 다스리는 질서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사랑과 봉사의 새 질서가 밑바탕이 되는 새 법을 헌법으로 삼는다. 교회 안에서는 꼴찌에 앉아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첫째가는 사람이다(마르 10,43-44: 마태 20,26-27: 23,11:루카 22,26 참조).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에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참견을 못했고 ‘조그만 게 까불어’란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하늘나라에서 첫째가는 위대한 사람은 세상에서 꼴찌가고 보잘 것 없는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예로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요청할 때 주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나무라던 제자들에게는(마르 10,13)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려면 이런 어린이 하나라도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자신과 어린이를 같이 생각한다는 뜻이며 여기의 어린이는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의 해석대로 순직, 소박, 겸손의 모범이다.
교회는 어린이와 같이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영상은 십자가의 수난길을 가는 치욕받는 ‘야훼의 종’이 영광의 갈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세속적인 생각을 돌리게 하는 교육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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