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의 신비는 특히 오묘하여 인간의 머리로서는 감히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바닷가의 소년과의 대화는 유명하다. 성인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그렇게도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하루는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역시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한 소년이 바닷가에 웅덩이를 파놓고는 바닷물을 그 웅덩이에 퍼 넣고 있었다. 성인은 그것이 너무나 어리석게 보여 “얘야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소년은 “바닷물을 이 웅덩이에 전부 퍼 넣으려고요”라고 했다. “허허, 어리석은 녀석 그게 될 법이나 한 일이냐? 이 넓고 넓은 바닷물을 그까짓 웅덩이에?” “참 어르신네도 딱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무량하신 하느님의 신비를 성인의 그 조그마한 머리로 규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소년은 그리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인은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그 자리에 꿇어 앉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규명해서 알아낼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와 그리고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유형무형의 존재 안에 하느님이 사랑으로써 함께 깃들여 있음을 나타내는, 더할 수 없이 고마우신 신비임을 체험할 성질의 것임을, 천사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일깨워 주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우리들에게 있어서랴!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저들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그렇게 절감하고 감사했던 것이다. 저들은 역사가 하느님의 손에 의해 움직여짐을 깨닫고, 그 하느님의 능력에만 의지함으로써,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용기를 가지고 그 소수민속이 강대국들을 물리치고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있었다.
하느님의 편재하심을 확신하는 민족이 그렇듯이 강한 것처럼 하느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은 얼마나 장하고 의연하며 행복할까!
따라서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오늘의 제2독서에서는 갈파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자녀이기에 의당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말할 것조차 없다. 이렇듯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전교’란 바로 이러한 축복을 나누는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일’이다. 그래야만 하늘의 ‘영광도 그(그리스도)와 함께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던 마지막 날에, 다음과 같은 막중한 사명을 내리시면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무한한 사랑의 축복까지 내리셨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두려울 것도 없고 어떤 난관이나 시련도 겁날 것이 없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시 23,1-4)
어리석은 일인 줄은 알지만, 참고로 동양에서의 삼위일체를 생활화하고 있는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와 또한 친밀한 위치를 생활화 할 수 있도록 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며 한다. 즉 태고의 건국신화에서 ‘천부경(天符經)’을 내리셨다고 하는데, 그 첫머리에 ‘비로슴에 하나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비로슴이 없는 하나이다. 그 하나가 셋의 지극한 것(절대적인 것)으로 나뉘었고, 그 셋이 바로 무궁무진한 그칠 줄 모르는 창조의 근원이더라’(일시무시, 석삼극무진본(一始無始, 析三極無盡本))고 했으며, 인간창조는 그 모태에서 삼신(三神)이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밖에 삼태극(三太極)은 삼원색(三原色)을 나타내며, 그 삼원색은 무궁무진한 변화를 일으켜, 각종 색깔을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는 만물생성의 원리로 보았다. 또 「도덕경 (道德經)」에서도 만물생성의 기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그 셋이 곧 만물을 생성하게 하였다’(德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덕경(道德經) 제42장>)
지금까지 집필해주신 김몽은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호 (6월 2일자)부터는 ‘복음단상’으로 제목이 바뀌면서 조광호 신부님(베네딕또 수도회)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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