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새해 첫날의 태양이 높이 솟았다. 세계성체대회를 통해 온인류, 온세계인의 가슴에 하느님 평화의 성취를 가슴 깊이 갈망했던 지난해를 되돌아 보면서 2천년대 선교시대를 눈앞에 두고있는 한국교회, 참된 공동체 정신의 구현을 어떠한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새해아침, 흔히 일상의 생활에서 쉽게 지나쳐 버리기 쉬운 도시와 농촌의 소외된 공동체의 삶의 현장을 찾아가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고, 향후 한국교회의 사목지표를 모색해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잃어버린 한마리의 양까지도 애써 찾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고, 목숨과 절개, 피로써 지켜온 우리의 보배로운 신앙의 유산을 온전히 간직해 오고 있는 산골짜기 신앙공동체를 잊어버리고서는 참으로「함께 사는 공동체」를 이뤄나 갈 수 없기 때문이다.<편집자註>◆
■ 도심속의 소외된 이들, 서울 도화동 도시빈민
여의도 광장과 신촌ㆍ용산을 잇는 도로가 시원하게 사방으로 연결돼 있고 밤이면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공덕동로타리. 이곳에서 옆에 있는 철길을 넘어 약 15분쯤 올라가면 도화1동ㆍ2동, 이른바 서울 마포구 재개발지역이 보인다.
재개발지역하면 누구나 산등성이에 멋대로 지어진 무허가 주택들이 가득 들어차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곳에는 전화가 휩쓸고 간듯한 부숴진 집들의 잔재로 이뤄진 넓다란 공터와 땅 정지 작업을 하고 있는 포크레인 그리고 아직도 보금자리를 찾지 못해 가슴졸이며 살고 잇는 두세군데의 세입자들의 낡은 집만이 있을 뿐이다.
얼핏보면 무척 조용한 이곳은 곧바로 보이는 잘 지어진 아파트와 주변의 교회건물 때문에 평화로운 느낌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의 원성과 아직도 갈곳이 없어 당국의 처분만 기다리는 이들의 생존요구의 간절함이 소리없는 함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
『이 추운겨울에 어디로 가라고 하는 것인… 하루벌어 하루먹고 살기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집도 없어진다니 막막하기만 합니다』
또 한차례 강제 철거 계고장을 받은 권정식(여ㆍ45세) 씨는 이 같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강제철거가 시작된 처음에는 언론과 여러 곳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는데, 주민중 거의 모두가 떠나고 세입자 23세대만이 남은 지금은 세인들에게 거의 잊혀져 외롭게 있다』며 고립감을 말해준다.
잔류 세입자들의 마음상태처럼 썰렁하기만 한 이곳은 지난 84년 재개발 공고가 나기전만해도 약 8천세대 4만명이 삶의 터를 이루고 있던 곳이다. 특히 20여년간을 이동없이 살던 이곳 사람들은 서로 유대감이 좋기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한 이곳에 재개발 공고가 된 이후 여러 이권문제 때문에 공동체 유대감은 깨져 인심이 각박해 졌고, 세입자들은 강제철거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다.
결국 이곳에도 다른 재개발지역처럼 강제철거와 이를 저지하려는 세입자들 간의 잦은 충돌이 벌어졌고, 5년이 지난 현재는 많은 이들이 권리를 찾아 이 지역을 떠났으며 재개발 지역으로 공고된 이후 이곳에 정착하게된 23세대만이 아무런 보장이 없는 가운데 오갈데 없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권정식씨는 재개발 현장 한가운데서 가옥의 형태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집에서 같은 처지의 세입자 3가구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남편과 본인이 가족의 전부인 권씨는 지난 86년 보증금 50만원에 월 5만원의 월세를 내고 이 집에 들어올때만 해도 강제철거당해 오갈데도 없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구청 새마을취로사업과 봉투 및 잔여일을 하면서 근근히 생활하고 있는 권씨에게는 다가오는 성탄절이나 연말연시가 두렵기만 하다. 그것도 언제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쳐 집을 철거 할지 모르기 때문.
『이제는 자포자기 상태입니다. 아니 글쎄 이곳에서 살고있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입주권을 주고,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나가라고만 하니 죽을 지경입니다』
권씨는 말하는 도중 주기적으로 이 같은 절망적인 신세한탄을 내내한다. 그만큼 권씨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상황에 지쳐있는 것이다.
80년대를 들어서 권씨와 같은 도시빈민들은 사회에 급격히 부각, 현재 서울인구의 30%, 전국에 4백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나라의 공업제일주의 정책으로 인한 이농현상으로 빚어진 이들 도시빈민들은 우리나라 발전의 원동력임에도 불구, 재개발정책으로 인해 끊임없이 사회로부터 소외받아 왔다.
그러던 이들 도시빈민들이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자하는 변화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시발점은 85년에 1백회 이상 격렬하게 시위가 전개된 목동투쟁이었고, 그 이후 눈에 띄게 도시빈민들의 단결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과거에는 천주교 도시빈민회나 기독교 도시빈민협의회 등과 같은 종교색채를 띤 도시빈민 조직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울시 철거민협의회와 같은 도시빈민들 스스로의 강한 연대 조직이 형성돼 있는 상태다.
그러나 천주교도시빈민회 일원이며 서울교구 도시빈민위원회 총무인 추영호 신부는『도시빈민들이 아무리 스스로의 연대조직이 강화되고, 자신들의 권익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그 권익을 찾는데에는 아주 미비하다』며『이들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나타나야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창신 3동, 남현동, 구로 3동 등등 여러 지역의 수많은 도시빈민들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천막을 치고 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의 애환이 언제 얼마만큼 해소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90년대를 여는 새해벽두에 각자의 위치에서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조금이라도 열린 마음을 갖자는 다짐을 하고 그렇게 실행하고자 한다면 도시빈민들의 애환은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이다.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상황에 잇는 권씨집의 옆방에 잠들어 있는 다섯살박이 아이가 정말 밝게 커나갈수 있을지….
<許楠기자>
■ 도심속의 소외된이들, 전북 진안군 어은동공소
순교의 피로 면연히 이어져오고 있는 한국교회 신앙의 맥은 대부분 심산유곡 골짜기에 세워진 조그마한 공소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순조ㆍ철종ㆍ고종ㆍ대원군 등 왕조 연간에 걸친 그 혹독한 박해를 피해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산중으로 숨어들어 집단 교우촌을 형성, 신앙의 뿌리를 튼튼히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곳에는 신앙 선조들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 기둥을 만들고, 흙으로 벽돌을 구워내고, 돌을 다듬어 지붕을 이는 등 온갖 정성과 열의를 깃들여 지어진 고풍스런 성전이 오늘을 사는 현대 신앙인들에게 풍요로운 안식처를 제공해 준다.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산 줄기를 따라 신앙의 밑거름을 튼튼히 다져온 집단교우촌, 8개의 공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1900년대에 건립된 어은동성당 행정상 정확한 지명은 전북 진안군 진안읍 죽산리 어은동 (魚隱洞). 현재는 읍내에 소재하고 있는 진안본당 관할 22개소의 공소중의 하나인 이곳은 진안읍에서 장수방면으로 가다보면 우측으로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심산유곡이다.
35가구가 계곡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은 2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구교우 집안으로, 대부분의 주민들이 산비탈에 고냉지 채소를 심거나 한봉을 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10여년전 산지개간을 위해 들어온 2가구 외에 이곳에 살고있는 신자 집안들은 대부분 병인학해 이후에 숨어들어온 신앙선조들의 후손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유하게 보존해오고 있는 믿음의 보고, 포근하고 정겨운 공동체임을 금방 느낄수가 있었다.
기자를 반갑게 맞은 공소신자들은 근년에 민주화의 열기로 온통 나라 안팎이 시끌시끌하던 때에 그저 신부님 말씀에 따라 행동하나 보니 정부기관으로부터 온갖 미움을 받게돼 생활이 무척 어려웠을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주민들은 이곳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질타와 반대만 일삼는 철두철미한 골수 야당원들이 아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에 따라「옳은 것은 옳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소박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갈 것을 항상 마음 깊이 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그러기에 금년 여름 홍수와 산사태로 가옥과 전답이 파손돼 현재까지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어도 그저 묵묵히 주어진 환경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지난해 올림픽 기간 중에 애써 농사지은 무우등 채소를 서울로 출하시키는 통로를 정부기관에서 차단, 밭에서 그냥 썩어가고 있을 때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지만 조상들이 가르쳐준 이해와 사랑으로 그 울분과 분노를 가라앉혔다. 한편 어은동은 6ㆍ25사변이 일어났을 때 인민군들에게는 임실에서 백운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놓여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인민군과 빨치산들의 통행이 많아 갖가지 행패와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후 단 한명의 희생자도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이곳 신자들은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있는 「은총의 땅」이라 생각하고 더욱 정결한 삶을 살아갈 것을 항상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
전라북도 내에서 고산 천호공소에 이어 두번째로 깊은 역사를 지닌 어은동공소는 1900년 9월에 김양홍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부임, 당시 함회장 집에 머물면서 그 이듬해 현재의 성당을 건립했다. 또한 김신부는 외부와의 단절로 인한 무지와 문맹의 타개를 위해「영신학교」를 세워 이 일대 학문과 문화의 전당으로 육성시키려 했다.
이와함께 어은동공소는 이명서 성인의 무덤이 자리한 곳으로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주교구가 천호성지를 단장, 성인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가고 난 지금도 어은동 모시골 입구에는 성인을 기리는 조그마한 묘비가 어은동의 공동체를 지켜주고 있다.
춘ㆍ추 판공때를 포함 연중 2~3차례정도 봉헌하는 외에 매주 오전 8시 30분 공소예절로 주일을 지낸다는 어은동 공동체는 자신들의 어려운 생활의 향상보다도 1900년 당시 김신부가 돌을 넓고 얇게 깍아만든「너와」로 지붕을 엮은 특이하고 유서깊은 성전을 원형대로 복구하고, 마을 길목 이명서 서인의 무덤터를 성지로 단장,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것이 없다는 소박한 소망을 지니고있다.
또 어은동 공동체는 신앙의 고향을 찾아 세속에 물든 마음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기를 원하는 도회지 신자에게 피정과 묵상의 장소를 제공하는데 정성을 다할 것이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와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해 갈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신앙의 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해오고 있는 산골 공동체, 90년대 한국교회는 이러한 곳의 소박한 신앙인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온연히 흘러나오고 있는「믿음의 향기」를 세상 정화에 충분히 활용해야 될 것으로 생각된다.
22개 공소의 판공성사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진안본당 주임 박찬길 신부는 『교회의 행정ㆍ경영적인 측면에서 다소 논리에 맞지 않을 것 같더라도,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더욱 넓혀간다는 뜻에서 농촌 공소에 대한 교회의 재정적 지원이 절실하다』 면서 『특히 농촌교회의 활성화는 농촌경제의 발전과 일면 맥락을 같이하고 있으므로 교회는 정부의 농촌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의 목소리를 높여나가는 일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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