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감별소 집회를 끌 마치고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자 직원이 “수녀님 원생 하나가 임신 3개월이에요” 하고 내손을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온 몸이 오싹 했다. 이럴 수가? 이 추운 겨울에 얼마나 고생이 될까? 퍽 가엾게 생각됐다.
잠시 후 김선생님이 14세의 홍양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단발머리에 얼굴이 핼쑥한 어린 소녀 모습이 으스스 추워 보였다. 얼굴엔 솜털이 보숭보숭하고 체구가 왜소한 홍양을 보는 순간 내 생각 같아선 와락 가슴에 꼭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애처롭게 보였고, 내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대로 순순히 대답도 하고 모든 것을 체념하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중학교 2학년예요 아빠는 시내버스 운전기사고요, 엄마는 ○○병원 청소부라서 새벽에 나가셨다가 밤중에 오세요. 동생 둘이 있는데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늘 집은 일거리가 가득한 채 텅 비어 있고 학교 숙제도 많은데 집안청소, 살림까지 돌봐야 하는 압박감과 쓸쓸하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어요. 공부도 하기 싫고 어디론가 멀리 멀리 도망가고 싶었어요. 친구들은 엄마 아빠 사랑받고 함께 살며 유명메이커 옷과 신발 등을 신고 학원도 다니는데 나는 그것이 무척 부럽기만 했어요. 누구한테든지 따뜻한 사랑을 받고 싶고 그래서 집을 나와 늘 행복하게 사는 그 부러운 친구 집에 놀러 갔거든요. 그런데 그 집 안방 화장대 위에 있는 저금통장이 눈에 띄었는데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충동이 일어나 참지 못하고 얼른 집어서 넣고는 겁이 나서 빨리 밖으로 나왔어요. 다른 친구 집으로 피해 다니는데 그전에 길에서 우연히 만나 오빠라고 부르며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모대학 2학년 함군을 또 만나게 된 거예요. 그때 나는 마음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과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그 오빠와의 만남이 행운같이 느껴지고 반가웠어요. 그날 그 학생과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거든요. 며칠 후 친구의 엄마가 고발해서 구치소에 구속되었고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가정법원에서 송치 되었어요. 어느 날 속이 메스껍고 헛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워서 진찰을 받았는데 임신 3개월이라고 했어요. 거짓말 같고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요”했다. 순간적인 악몽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어떻게 무슨 말로 이 아이를 위로 해줄까? 나도 막막해서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한참동안 기도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어서 호기심은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현실로 닥쳐올지는 정말 몰랐거든요. 이제는 집에만 얌전히 있겠어요”하고 몸을 움츠렸다. 이제는 세상이 무서워지는 모양이다. “엄마가 세 번 면회 왔었어요. 엄마가 다니시는 병원에 가야하나봐요”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머리를 수그렸다.
가정교육의 부재로 인한 무지와 애정 결핍으로 순간적인 절도를 하고, 자기 딸 친구를 고발조치한 비정한 사람들 속에서 선도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만 이소녀의 가련한 처지는 누구를 탓해야 할까?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 나는 정말 엉엉 울고 싶었다. 통장도 돌려주고 합의도 봤다고 했다.
나의 수차에 걸친 부모들 상담을 통해 홍양은 부모들이 자신들의 방임을 뉘우치고 절도한 돈을 보상해준 후 소년 재판부를 거쳐서 귀가 조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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